인기리에 방송되고 있는 사극 ‘정도전’. 조선 초 최고의 정치가를 재조명하는 사극에 팬들이 열광하고 있다. 정도전은 조선 개국의 일등공신이자, 실세였다.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설계했고, 한양 천도를 통해 경복궁 밑그림을 그렸다. 조선 번영을 위한 각종 법률 제도도 고안했다. 그런데도 이방원에게 죽음을 당했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신원(누명에서 벗어남)된 시기다. 이방원 세력에 의해 축출된 그는 고종대에 이르러서야 신원됐다. 고려의 충신으로 역시 이방원에 의해 죽음을 당한 정몽주가 13년 만에 신원됐는데, 조선 설계자 중 하나인 정도전이 억울함을 벗은 것이 500년이 흐른 뒤라는 게 아이러니하다. 이유는 하나다. 정도전은 신권주의인 ‘재상제’를 주장했다. 왕권주의가 지상과제였던 조선의 왕들에겐 조선 새 왕조를 거부한 정몽주보다, 재상제를 주창한 정도전이 더 용서못할 인물이었다는 뜻이다.

여느 집과 같이, 기자의 본가 명절 밥상머리에서는 여러 가지 화제가 올랐다. 어른들 사이에선 지역 건설 경기, 박근혜정부에 대한 평가, 6ㆍ4 지방선거 얘기가 한 바퀴를 돌았고, 이어 조카 몇 명이 얘기 속에 끼어들었다. 이슈는 단연 삼성의 대학총장추천제였다. 일주일 전에 해프닝으로 끝난 화두였지만, 취업준비생들에겐 여전히 관심사였던 모양이다. 조카 한 녀석은 “삼성 취지는 좋지만, 어느 대학은 몇명, 어느 대학은 몇명 식으로 대학을 서열화했다는 게 기분이 나쁘다”고 했다. 제법 논리가 갖춰져 있다. 마침 거실 TV에선 사극 정도전을 방영하고 있었다. 이때 정도전의 신원과 삼성의 대학총장추천제의 연결고리가 퍼뜩 떠올랐던 것은 왜 일까. 삼성이 총장추천제를 택한 것은 간단한 이유에서였다. 삼성은 고유의 삼성직무능력시험(SSAT)을 고안했지만, 점점 이 시험은 고시열풍처럼 번졌다. 응시자만 수만명에 달하는 과열 현상을 잠재우고, ‘삼성이 고시문화를 만들고 있지 않느냐’는 정부의 곱잖은 시각을 잠재울 아이디어로 총장추천제를 기획한 것이다. 어쩌면 출발점은 선의(善意)였다.

하지만 결국은 보름 만에 총장추천제를 거둬들일 수밖에 없었다. 선택받지 못한 일부 대학의 반발과 사회적인 찬반 이슈가 부담이 됐기 때문이다.

정도전이 재상제를 추구하다 역적으로 몰린 일과 삼성의 채용실험을 비유하는 것 자체는 어불성설이다. 국가 존망을 좌지우지하는 큰 이슈와 일개 기업의 채용문화와는 스케일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둘의 공통점은 있다.

기존의 굳건한 성벽이 존재하는 한 ‘상자 밖의 아이디어’를 실행하고, 오랜 틀을 깨뜨리기엔 너무나 어렵다는 점에 있다. 삼성의 총장추천제는 ‘스카이(SKY)’를 고집하지 않고 지방대도 중용하는 삼성이기에 할 수 있는 최적 채용실험일 수 있었으나, 일단 합의가 없었고 자의든 타의든 대학들이 굳이 거론하고 싶지 않은 ‘서열화 문제’를 끄집어냈다는 게 죄로 작용했다. 삼성이 섣불렀다는 점엔 이견이 없다. 다만 특정 계층의 거대한 성벽이 존재하는 한 이 같은 실험은 당분간 힘들어 보인다는 점은 안타까운 일이다. 이게 누구의 손해일까. ‘틀’은 점점 깨져야 하는 것은 아닐까.

김영상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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