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김기훈ㆍ정태란 기자] “나는 북관에 혼자 앓어 누워서/어늬 아츰 의원을 뵈이었다/의원은 여래같은 상을 하고 관공의 수염을 드리워서/먼 녯적 어늬 나라 신선 같은데/섀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드니/문득 물어 고향이 어데냐 한다 (중략) 의원은 또다시 넌즈시 웃고/말없이 팔을 잡어 맥을 보는데/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백석의 시 ‘고향’의 일부다. 외로운 타향살이 중 몸이 아픈 시인은 동향 출신의 의원을 만나 그의 따사로운 손길에서 고향의 향기, 아버지의 숨결을 느낀다는 내용이다. 이처럼 고향은 생각만으로도 정겹고 따뜻한 곳이다.
꿈에서도 고향이 어른거리는 명절, 실향민과 탈북자, 이주 노동자들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더 애틋하다.
황해도 백성군 출신의 유휘두(86) 할아버지는 1950년 한국 전쟁 중 홀로 남하해 지금은 북측 가족의 생사조차 알지 못한다. 유 할아버지는 고향 땅이 그리워 그나마 북한에 가까운 파주를 방문해 그리움을 달래곤 했다. “누구 하나 올 사람이 있어, 갈 사람이 있어?” 유 할아버지는 자신의 신세를 짧게 한탄했다. 분단이 갈라놓은 세월, 유 할아버지의 고향은 지도엔 있으나 밟을 수 없는 땅이었다. “이번 설엔 부인과 단 둘이서 떡국이나 해먹을 요량”이라는 유 할아버지의 말에는 실향민의 서러움이 잔뜩 묻어났다.
새터민 김애경(가명ㆍ53ㆍ여) 씨는 함경북도 회령군서 탈북한 지 9년이 지났다. 신정을 쇠는 북한과 달리 남한은 구정 쇤다는 걸 북한에서 탈출한 다음에야 알았다. “북한에서 지내던 시절과 비교하면 지금은 매일매일이 명절이죠.” 고기 대신 두부라도 사 먹으면 그게 명절이라고 생각할 만큼 굶주렸던 삶이었다. 하지만 절대적 빈곤을 벗어나도 명절을 생각하면 김 씨의 가슴은 찢어지는 듯 아프다. “북한에 1남 2녀가 있는데 소식도 몰라요…. 자식들 그리움에 물질적으로 풍족해서 살아가는 게 더 괴롭죠.”
파키스탄 출신 외국인 노동자인 샤문(24) 씨는 “고향에 있는 가족들이 많이 그립지만 주위에 동료가 있어서 든든하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온 지 4년째인 샤먼 씨도 물론 명절이 돌아올 때마다 그리움이 북받친다. 하지만 파키스탄 식당에 가서 전통 음식을 먹고 같은 처지의 친구들도 어울리며 애써 그리움을 달래고 있다. 샤먼 씨는 “인터넷 영상통화로 가족들에게 안부 인사라도 전할 수 있어 다행”이라며 스스로를 달랬다.
한편 자발적으로 귀향을 포기한 ‘귀포(귀향포기)’족도 있다. 이들은 설 명절 연휴를 고속도로에서 보내기보다 공연 관람, 해외여행 등 여가를 위해 보내거나 성형, 공부 등 자기 계발에 시간을 쏟는다. 명절 때 고속도로 다음으로 붐비는 곳은 성형외과와 공항의 국제선 노선이라 해도 빈말이 아니다. 또 자녀들이 고향으로 내려가기보다 부모나 자녀가 있는 서울로 역귀성하는 모습도 더는 새로운 명절 풍속도가 아니다.
헤어졌던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되는 만큼 명절 술상엔 정치 이야기가 꼭 안주거리로 빠질 수 없다.
부모의 성화에 못 이겨 부모의 고향길로 가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마음은 고향에 있지 않다. 귀향길 내내 스마트폰을 손에서 떼지 못한다. 마음은 본인의 고향인 스마트 세상에 있다.
대학생 김정수(25) 씨는 “솔직히 아버지 고향에 계신 할아버지 만나러 가는데 내키지는 않는다”며 “나중에 내가 결혼할지 모르겠지만, 결혼한다면 자식들에게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명절 때 와라 가라 하는 소리는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서히 바뀌는 명절 풍속도.
한 때 제삿상을 주문하는 업체의 서비스가 TV에 나올 때도 있었다. 설 명절 때 해외 여행을 떠나는 가족들을 희한한 눈빛으로 보는 이들도 많았고, 콘도로, 리조트로 여행을 떠나는 이들을 경이롭게 볼 때도 있었다.
그러나 최근 이런 얘기들은 이미 과거 스토리가 돼 버렸다.
이제 젊은이들에게 명절은 그냥 좀 더 긴 연휴정도일 뿐이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명절이 가족들이 만나는 시간이 아닌 ‘설케이션’(설 버케이션ㆍVacation)이 될 날도 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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