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트렌드(Trend)’라 치자. 나팔바지 시절을 지나 드럼진에 이어 힙합, 스키니진 시대가 벌써부터 왔다. 가만 보니 그것뿐이다. 잘 나가는 드라마가 만들어낸 패션이라고 별 게 없었다. 시대 흐름에 맞춘 청바지에 티셔츠 하나 걸쳤을 뿐인데 곧 유행이 된다. “저게 대체 뭔데” 싶어 백화점에 들르니 이미 다 팔렸다. 이른바 ‘완판(완전 판매)’이었다. 다양한 삶의 바퀴를 살고있는 캐릭터를 중심으로 102호나 202호나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인생사가 표현되다 보니 드라마 속 패션은 때때로 ‘보편 타당’해진다. 당위적 명분에 충실한 인기드라마가 ‘완판녀’를 만들어내는 척도가 되는 때다. “연예인은 움직이는 광고판”이라는 말, 여기에도 해당된다. 이유는 단순하다. “따라할 만”하거나, “따라하고 싶은” 욕망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 “이 정도면 나도?” 따라할 만한 그녀의 스타일=50%에 육박하는 시청률로 마침표를 찍은 국민드라마 ‘내 딸 서영이(KBS2)가 남긴 것은 비단 가족애만은 아니었다. 드라마 종영 다음날 인터넷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순위 상위권에 뜻밖의 키워드가 등장했다. 바로 ‘서영이 백’이었다.
느슨한 청바지에 후줄근한 티셔츠를 한 장 걸치고, 다 헤진 백팩을 메던 서영(이보영)이가 재벌가로 시집간 ‘전문직 여성’이 되자 스타일은 일대 변신을 거듭했다. 캐릭터의 성격이 묻어난 단정한 오피스룩 차림의 변호사였다. ‘서영이 패션’의 방점을 찍은 것은 다양한 핸드백이었다. 일명 ‘서영이 백’으로 불린 이것들은 데레쿠니, 루이까또즈, 더블엠 등의 브랜드에서 출시되는 백이었다. 패션에 문외한인 사람들이 일컫길 ‘서류가방’을 연상시키는 이 숄더백은, 디자인보다는 실용성을 강조하며 세칭 ‘잇(it) 백’이 됐다.
서영이 패션이 여성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따라하기 쉬운’ 스타일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드라마 속 이보영의 패션은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너무도 흔하게 봐오던 옷차림이다. 패션업계 관계자가 본다면 다소 진부하고 답답해보이는 스타일일 수도 있으나 “내가 해도 괜찮겠는데”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대중은 이를 인기상품으로 만들어낸다.
▶ “내가 해도 괜찮을까?” 따라하고 싶은 그녀의 스타일=평범하고 무난한 스타일에서 내 취향을 찾기에 드라마 속 완판녀가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패셔니스타 공효진(‘최고의 사랑’ㆍMBC)이 선보였던 ‘왕년의 스타’ 패션은 쉬워보이지만 결코 무난하지는 않았다. 과감한 시도를 위한 마음가짐이 필요한 탓이다. 그럼에도 공효진 스타일은 걸쳤다 하면 완판이었다.
시간을 거슬러 1996년으로 가보면 ‘애인(MBC)’에 출연했던 황신혜 스타일에 열광했던 수많은 중년여성들이 등장한다. 드라마에서 황신혜는 유동근과 함께 ‘우리가 하면 로맨스’의 서두를 알리는 장면에서 완판의 신호를 읽었다. 자신의 바지에 초코 아이스크림을 묻힌 유동근의 딸로 인해 당황하면서도 의연하게 가방에 걸쳐놓은 하얀색 가디건을 허리에 두르자 판매율이 급증하는 소리를 듣게 됐다.
배우 김희애와 장미희도 마찬가지다. 두 사람은 2007년작 ‘내 남자의 여자(SBS)’와 2008년작 ‘엄마가 뿔났다’를 통해 서로 다른 스타일을 선보였다. 김희애는 도발적이면서 우아한 스타일로, 장미희는 도도한 ‘강남 사모님’ 패션으로 ‘중년의 완판여왕’으로 등극했다.
‘세월의 길이’가 가져다준 외모의 변화와는 무관하게도, “내가 해도 괜찮을까” 싶은 호기심이 피어오르면 대중들은 잠재된 욕구에 맞춰 움직였다. 동떨어진 세계 보다 접근이 쉬운 드라마 속 스타일이기에, 이내 따라하고 싶고 닮고 싶은 그들의 갈망이 수많은 배우들을 완판녀 대열에 올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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