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직인생에서 운명처럼 만난 기능올림픽…그녀의 50년 스토리
초등학생 때부터 뜨개질…교생실습 나갔던 학교 학생들과 편직 전시회 준비하며 본격적으로 관심 갖기 시작했지
1957년 제일편물 시작하자 “진사집 딸이 웬 상업이냐” 집안 어른들 극구반대…마지막이라는 각오로 연 전시회가 경기여고 스웨터 체육복 탄생시켜
일본유학 시절 가게 된 유럽에서 국제기능올림픽대회 알게 돼…각국서 모인 사람들이 자신의 기능 뽐내는 경연장은 충격과 감동 그 자체…
1966년 국내 첫 기능올림픽 개최·1967년 국내 최초 국제기능올림픽 금메달 산파 역할…한국의 뛰어난 기술 세계에 깊은 인상 심어 큰 보람
1931년생, 올해로 83세인 김순희 서울 남산 초전(草田)박물관장에게 50년의 시계를 되돌려 달라고 부탁했다.
그녀의 기억 속, 한켠에 대한 얘기를 듣고 싶어서였다. 대한민국 기능올림픽의 산증인이라는 얘기를 들었던 터였다. 그녀의 나이 때문이었을까. 내심 기억이 가물가물할 것이라 생각했다. 무려 50년 전의 스토리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기억력은 너무나 생생했다. 생생하다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팔딱팔딱, 그녀는 자신의 스토리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이름 석 자를 또박또박 입 밖으로 꺼냈다.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사람부터 80~90살 된 이들까지, 그녀는 그들을 타임머신에 태운 채 1960년대 어느 날의 30대 등장인물로 부활시켰다.
제일편물이라는 편직 스웨터 전문업체를 설립했고, 제일편물학원을 만들기도 했던 그녀. 일본으로 연수를 떠났을 때 우연히 유럽으로 학습여행을 갔고 그곳에서 ‘국제기능올림픽대회’라는 것을 봤다. 귀국한 후 그녀는 국가에서 주도적으로 기능올림픽대회를 밀어붙일 수 있는 기초를 제공했다. 이후에도 국제기능올림픽대회에 나가는 선수들을 위해 음지에서 꾸준히 그들을 돌봐줬다. 다른 한편으로 그녀는 국내에 편직을 알리는 선구적 역할도 했다.
그녀의 50년 스토리를 찬찬히 들여다봤다.
새로운 것들에 궁금했던 그녀 초등학생 때부터 뜨개질에 관심이 많았고, 소질도 있었던 김순희 관장. 동네에 200가구 가량이 있었는데, 한 4번째 정도로 잘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부유한 집. 그녀는 남부러울 게 없었다. 유복한 시절을 보내던 그녀가 경기여고에 재학 중이던 1950년 6ㆍ25가 터졌다. 이듬해인 1951년 1ㆍ4후퇴 때 그녀는 종가(宗家)가 있던 경북 안동으로 가 안동여고를 다녔다. 당시 시골에서는 가을 추수를 끝내고, 남녀불문 화투를 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게 다반사였다.
그녀는 “시골 어르신들에게 화투를 치고 술 마시면서 시간을 보낼 게 아니라 다른 것을 해보라고 말했지만 마땅히 대안이 없었어요. 그래서 생각해낸 게 뜨개질이었죠”라고 말했다.
그녀의 편직(編織)인생 시작점이었다. 3개월의 안동 생활 이후 그녀는 “이렇게 해서는 대학에 들어갈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부산으로 옮겨가 공부한 끝에 서울대 생물학과에 합격했다. 그러나 보수적인 집안 내력 때문에 학교에 들어갈 수 없었다. “여자가 무슨 생물학이야”하는 분위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녀는 이화여대 사범대학에 입학했다. 몇 년 후 그녀는 모교인 경기여고에 교생 실습을 나갔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편직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학생들과 같이 며칠 밤을 고생해 편직 전시회를 열려고 했지만, 전시회 전날 도둑이 들어 전시품을 모두 도난당하기도 했다. 그래도 그때 학생들과 함께 뜨개질을 하면서 편직에 대해 아련한 꿈을 꾸게 되었다.
그녀는 1957년 서울 충무로에서 제일 큰 빵집이 문을 닫자, 그 자리에 세를 들어가 당시 자본금 200만원짜리 회사 ‘제일편물’을 설립했다.
김 관장의 시골집에서 난리가 났다. “진사(進士) 집안 딸이 웬 직물이고, 웬 상업이냐?”는 거였다. 하루가 멀다하고 문중에 불려다녀야 했다. 그래서 그녀는 집안 사람들과 약속을 했다. “3년만 하겠다”고. 그리고 1960년 되던 해 다시 “마지막 전시회를 한 번 하고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의 마지막이 될 뻔한 전시회가 신세계백화점에서 열렸다.
전시회에서 그녀에게 기적과 같은 일이 벌어졌다. 전시회장을 찾은 당시 경기여고 교장이 김 관장에게 와서는 그녀가 만든 한 제품을 가리키며 “저걸로 경기여고 체육복 하면 어때?”하는 것이었다. 감색 바탕에 흰색, 밤색이 들어간 스웨터 상의였다. “저 옷에 흰바지를 애들에게 입히면 어떨까?” 이후 그녀는 스웨터 체육복을 만들었다.
당시 감색 바탕에 흰색, 밤색이 들어간 스웨터는 좀 과장되게 말해 ‘센세이셔널’했다. 특히 국내 최고의 경기여고에 스웨터로 뜬 체육복을 만들어 줬다는 것은 빅뉴스였다. 장안의 화제가 된 감색 바탕에 하늘색, 빨강, 흰색으로 된 체육복이 경기여고 최초의 체육복 탄생 배경이었다.
이름을 날렸지만 집안의 반대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녀는 학원을 하는 방법으로 집안 반대를 피해 갔다. 1962년 제일편물학원을 시작했다. 상업은 안 돼도, 교육업은 된다는 식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김 관장은 “당시 우리 스웨터를 입기 위해 몇 달을 기다린 손님들도 있었지. 그때 우리 옷 입은 애들이 지금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재벌집 사모님들이 다 돼 있어”라고 말했다.
일본 유학 중 떠난 유럽 여행, 그녀를 바꾸다 1964년 김 관장은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가 유럽에 견학갈 기회가 생겼다. 말이 여행이지 비자를 받을 수 없어 일본 학생들과 달리 유럽 방문 국가마다 비자를 받아야 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때 뜻하지 않게 운명과도 같이 국제기능올림픽대회를 엿볼 수 있었다. 당시 국제기능올림픽대회는 충격 그 자체였다. 세계 각국에서 모여 각자의 기능을 뽐내는 경연장이라니. 김 관장은 당시 “우리나라도 이런 대회에 참가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막연한 생각을 하면서 귀국길에 올랐다.
유럽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직항편이 없었던 터라 어쩔 수 없이 일본을 경유해야 했다. 일본행 비행기 안에서 우연히 한 남자의 옆자리에 앉게 된 김 관장. 이 남자는 나중에 알게 됐지만 당시 현대경제일보 사장이었다. 그녀는 이 남자를 그저 ‘석 중령’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석 중령은 김 관장에게 “단골손님의 아버지”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석 중령은 김 관장이 말한 국제기능올림픽대회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서울로 돌아온 후 김 관장을 석 중령이 불렀다. 그 자리에서 석 중령은 김 관장에게 “비행기에서 얘기했던 것을 다시 말해 달라”고 부탁했다. 석 중령 주변에는 10여명의 남자들이 김 관장의 말에 귀를 쫑긋 세웠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김 관장이 한 얘기를 석 중령이 당시 실세였던 국무총리 김종필(JP) 씨에게 말했고, 김종필 씨가 김 관장을 다시 총리실로 불러들였다.
수차례에 걸쳐 김 관장은 국제기능올림픽대회에 대한 얘기를 했고, 결국 정부는 기능올림픽을 정부 주도하에 치밀하게 진행했다. 1966년 국내에서 첫 국내 기능올림픽이 열렸다. 67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리는 제16회 국제기능올림픽대회에 참가하기 위한 전초전 성격이었다.
김 관장은 이때 양복을 만들었던 홍근삼 씨와 함께 국내 최초의 국제기능올림픽대회 참가에 산파역을 톡톡히 했다.
그녀의 노고는 사라진 기능올림픽대회 역사
김 관장이 유학길에 보고 배운 점을 토대로 국내에 도입된 기능올림픽. 그러나 기능올림픽 역사에서 ‘김순희’라는 이름 석 자는 없다. 오로지 당시 국무총리였던 김종필 씨의 이름만 올라와 있다. 김 관장이 발벗고 나서 도움을 줬던 홍근삼 씨의 이름 역시 찾아볼 길이 없다. 김 관장은 “서운하지. 나도 서운하지만, 나야 어쩔 수 없다고 해도 홍근삼 씨의 이름을 명예의 전당에서 뺀 것은 정말 큰 실수야”라고 말한다.
홍근삼 씨는 국내 대회에서 금메달, 그리고 첫 출전한 스페인 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인물이다.
김 관장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국제기능올림픽에 대한 위상과 범정부적 지원은 날로 확대됐다. 당시 대통령이 직접 선수들에게 식사 대접을 했을 정도였다. 당시 표현대로라면 “내려주셨다”고 했지만, 귀했던 삼계탕이 식사로 나왔다고 그녀는 되새겼다. 금일봉도 줬는데, 10만원짜리 수표를 한 장씩 넣은 봉투를 나눠줬다. 당시는 큰 돈이었다. 카 퍼레이드도 했고, 국민들도 국제기능올림픽대회에서 메달을 딴 선수들을 영웅으로 추대해줬다.
당시 선수들이라고 해봤자, 흔히 ‘~장이’라는 직업 비하적인 단어가 붙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신발장이, 양복장이, 미장이 등등. 그래도 대통령은 등을 두드려 줬고 머리를 만져 줬다. 이들에게 대통령의 손 끝은 감동이었고, 영광이었다.
당연히 선수들이 국제기능올림픽대회에서 금메달을 거머쥐기 위해 온몸을 다 바칠 정도였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 때 이후 이런 분위기는 많이 줄었다. 그래서 “아쉽다”고 김 관장은 씁쓸해했다.
그녀의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감동 1978년 부산에서 제24회 국제기능올림픽대회가 열렸다. 당시 모두 24개의 금메달을 따냈다. 김 관장은 “그때까지만 해도 여자는 어디도 내보내지 않았다”며 “선수들을 도와주는 기술위원도 모두 남자였어. 그래서 여자 선수들 뒷바라지 해줄 수 있는 여성위원들을 뽑아 달라고 졸랐지”라고 말했다.
결국 25회 영국 아일랜드에서 열린 대회에는 모두 8명의 여성이 참가할 수 있었다. 당시 처음으로 미용 분야에서 1등, 금메달이 나왔다. 김 관장을 비롯해 모두 흥분의 도가니였다.
김 관장은 당시 미용 1등을 한 여자 선수에게 “한복을 입고 시상식에 가자”고 제안했다. 구체적으로 빨간 치마에 녹색 저고리를 입자고 했고, 머리도 따자고 말했다.
기능올림픽 사상 첫 미용 금메달을 자축하기 위해 고안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첫 여성 금메달이다 보니 여자 선수가 당황해 했다. 특히 축하를 하며 시상자가 수상자의 볼에 뽀뽀를 했는데, 금메달리스트가 자꾸 빼는 거였다.
김 관장은 “경험이 없으니 인사법조차도 모를 수밖에 없었다”며 “당연한 거였지만, 당시로선는 참 당혹스러웠다”고 말했다. 당혹스러운 순간이 지나고, 선수는 물론 기술위원 등이 한데 뭉쳐 ‘옹헤야’를 불렀다.
경상도 지방 민요인 옹헤야를 한국선수들끼리 불렀는데, 시상식장에 있던 다른 외국인 선수들도 같이 옹헤야를 따라 부르며 축제 분위기를 한껏 높였다.
김 관장의 우리 것 예찬 미용 분야에서 첫 금메달을 딴 여자 선수에게 한복을 입고 시상식 단상에 올라가라고 한 것처럼 김 관장은 한복 예찬론자다. 올 초 대통령 취임식 때도 김 관장은 박근혜 대통령이 왜 한복을 입지 않았느냐(한 번 입기는 했다)고 아쉬워했다. 박 대통령 취임식만큼 한복을 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고 강조하는 김 관장. 김 관장은 “전 세계 40여개 국가를 다녀봤는데, 꼭 한복을 챙겨 다녀. 한복을 입고 어딜 다니면 전 세계 사람들의 눈이 우리에게로 쏠리는 것을 볼 수 있지”라고 말했다. 김 관장은 또 “한복 2벌 갖고 가면 4벌을 갖고 간 효과를 낸다. 당의까지 챙기면 더 많은 옷을 준비해 간 것 같다”고 치켜세웠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6ㆍ25가 나고, 1ㆍ4후퇴 때 안동여고에 갔을 때 최근까지도 연락을 했던 친구들이 다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인생이 허망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수차례에 걸쳐 외국으로 유학을 떠날 수 있는 기회도 있었지만, 그녀는 그때마다 뭔가에 걸려 유학길에 오르지 못했다. 지금도 못내 그때 공부를 더 하지 못했던 게 아쉽다고 말한다.
게다가 지난 50여년 동안 오로지 편직 분야에 전념하며 명장까지 오르고, 대한민국에 국제기능올림픽대회 제안은 물론 후학들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줬지만 남은 게 아무 것도 없다고 했다.
헌정(獻呈)을 하는데, 그동안 받은 수많은 상들이 점수로 매겨져 올라가는 것을 보고 스스로 물었다고 했다.
“김순희. 너 지금까지 뭐했니”라고. 그래서 아쉽고, 또 아쉽다고 했다.
80여 년을 살아온 그녀가 아쉽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서울 남산 초전박물관을 나왔다.
허연회 기자/okidoki@heraldcorp.com
김순희 관장이 걸어온 길 ▷1931년 출생 ▷1951년 경기여고 졸 ▷1955년 이화여대 사범대 졸 ▷1957년 제일편물 창업 ▷1962년 제일편물학원 설립 ▷1998년 초전섬유·퀼트박물관 설립 ▷1999년 문화외국어학원 설립 ▷2000년 11월 대한민국편물명장 1호 ▷2001년 한국섬유퀼트문화협회 창립협회장 ▷2004년 제36회‘신사임당 상’수상 ▷2007년 제10회‘자랑스런 박물관인상’수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