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영주] 칠순을 앞둔 노(老)학자, 17살의 새 왕에게 ‘공부 좀 하라’고 다그친다. 군왕 수업을 받지 못하고 어지러운 세상의 어린 왕이 되었으니 나라와 임금에게 충성스러운 신하로서는 앞날이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선왕 명종(明宗)이 후사 없이 34살의 젊은 나이로 죽자 우여곡절 끝에 후궁 출신 서자 선조(宣祖)가 정통성 문제를 안은 채 조선 제 14대 왕에 올랐다. 1567년 그의 나이 17살이었다.

이 무렵 세상은 기묘사화 등으로 죽고 죽이는 어지러운 시절이었다. 선조는 제일 먼저 그동안 정권을 잡았던 훈구파들을 몰아내고 여러 사화로 화를 입은 사림파들을 속속 등용했다. 을사사화 이후 중앙관직을 고사했던 퇴계 이황도 더 이상 부름을 거절할 수 없어 다시 중앙으로 나아갔다. 예조판서, 대제학 지경연 등 그에게 잇따라 직무가 주어졌다.

그러나 퇴계는 무엇보다 이 어린 왕이 걱정이었다. 세자로 낙점도 못받았던 후궁의 아들, 중종의 일곱째 아들인 덕흥군의 셋째아들이었으니 어느 누군들 그가 왕위를 이을 것으로 생각이나 했을까. 사전 교육이 충분치 못했음은 당연했다. 아직 10대인 왕에 비하면 퇴계 자신은 이미 ‘지는 해’였다. 왕과 나라 생각에 마음이 편치 못했다.

조정에 들어간 퇴계가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었을까. 선조 곁에 계속 있어줄 수 없음을 감지한 퇴계는 결단을 내린다. 어린 왕에게 ‘과제물’을 내주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그는 조정을 나서기 전 마지막으로 고민 끝에 상소문을 올렸다. ‘성군이 되기 위한 10가지 덕목’을 왕에게 강한 어조로 아뢴 것이다. 쉽게 말하면 ‘성군이 되기 위해 공부 좀 해라’다. 그게 바로 ‘성학십도(聖學十圖)’였다. 퇴계 나이 68세이던 1568년, 그가 죽기 2년 전 임금에게 ‘교재’로 만들어 올렸다.

임금의 반응이 너무 좋았다. 널리 보급해 모두 익힐 수 있게 인쇄판까지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퇴계는 옛 선현들이 가르쳐온 유학에 자신의 이론과 설을 보태 성학십도를 저술했는데 이는 곧 퇴계 성리학의 정수였다. 퇴계는 인쇄해 병풍으로 만들어 방에 두고 늘 익히게 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569년 조정에서 완전히 물러난다. 고향에 돌아온 퇴계는 1년후 칠순에 눈을 감는다.

그가 죽자 선조는 3일간 정사를 폐하고 애도했다.

조선 27명의 왕 중 처음으로 방계계통에서 왕위에 등극한 어린 선조, 그리고 조정을 걱정한 퇴계, 이 두 사람 사이를 메워준 것이 바로 성학십도였다. 늙어버린 퇴계 또한 이것이 나라에 마지막으로 보답하는 길이라 생각했다.

그 성학십도 원판이 있는 곳, 소수박물관을 찾아갔다. 이 목판은 이웃 안동에서 조차 그렇게 소장하고 싶어하는 퇴계의 유물이다. 영주시민들에겐 크나 큰 자부심의 대상물이기도 하다.

소수박물관은 전통 유교문화 유산을 체계화하고 최초의 사액서원이 된 소수서원을 통해 정신문화의 뿌리를 찾아가는 공간이다.

경북 영주시 순흥면 소수서원 뒤쪽 죽계천을 건너 숲 속에 아늑하게 들어앉은 박물관이다.

소수서원을 관람하고 이 소수박물관에 오면 유교문화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와 영주 일대를 둘러싼 귀한 유물들을 감상할 수 있다. 보유 유물 수 2만여점에 600여점을 전시하고 있다.

박물관에서 만난 최인희 해설사 선생님은 필자를 성학십도 앞에 데리고 가서 목청을 돋구며 설명했다. 마치 자신의 가보(家寶)인 양 자부심을 갖고 설명했다. 이 성학십도를 생각하면 영주시민이라는게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른다고 말한다.

퇴계의 ‘성학십도(聖學十圖)’ 원판이 유리관 속에 전시돼 있었다. 퇴계 선생이 작고 2년 전 17살의 어린 선조에게 내 준 바로 그 과제물의 인쇄판이다. 어지러운 세상에 왕위에 오른 어린 왕이 얼마나 걱정됐을까. 못된 관리들은 백성들 약탈을 일삼는데, 성군이 나타나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게 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집필했다고 한다. 성학십도는 말년에 정리한 ‘퇴계철학의 결정판’이라는 평가다.

옆에는 성학십도를 인쇄한 10폭짜리 병풍도 전시돼 있었다.

이 귀중한 유물도 일제시대 빼앗길 뻔 했던 순간, 한 주민의 지혜로 무사했다.

당시 소백산 일대 의병군을 쫓던 일본군이 영주 곳곳을 뒤졌다. 의병들은 몰래 이 집 저 집으로 숨어들곤 했지만 몸을 완전히 숨기진 못햇다. 그 때 영주의 괴헌고택에서는 의병은 물론 이 성학십도를 집의 천정에 숨기고 도배까지 하는 기지를 발휘해 일본인 눈을 감쪽같이 피했다. 우여곡절 끝에 살아남은 성학십도를 훗날 박물관에 기증했고 이젠 ‘영주시의 보물’이 됐다. 영주시민들이 어떻게 자부심을 갖지않을 수가 있을까.

박물관에서 또 관심있게 볼 유물로 순흥읍내리 고구려식 벽화고분이다. 남한 유일 고구려식 고분벽화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영주지역은 한때 고구려의 최남단 영토에 해당했다. 그런 영향으로 이 고분은 신라, 고구려, 백제 양식의 혼합체다. 재밌는 것은 이 그림에 서역인이 등장한다는 것. 삼국시대 전후 이 영주땅에 이미 서역인이 발을 들여놓았다는 얘기다. 이 고분은 서기 539년 조성됐으며 지난 1985년 발굴됐다.

금동미륵반가사유상도 중요한 유물이다. 국보 제78호로 삼국시대 예술품이다. 안타깝게도 지금 필자가 본 것은 모형품이다. 진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소백산의 초암사 터에서 발굴됐다. 이 사유상은 외국 전시회에 나갈 때 보험만도 수백억원 든다고 하니 가히 그 가치를 알 만 하다.

안향, 주세붕 선생의 초상화 역시 이곳에 전시돼 있다. 하지만 진품은 조명으로 변색되기 때문에 수장고에 보관하고 이곳엔 똑 같은 사본을 전시하고 있다. 안향 초상화는 고려 충숙왕이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 회헌 안향 선생을 기려 그리게 해 선생의 종가에 하사했는데 다시 소수서원에 봉안했다.

이 초상화는 여러가지로 의미깊다. 빨간색은 꽃, 검은색은 곤충 등에서 색을 뽑아 그렸다고 하니 놀랍다. 말 그대로 천연안료를 썼다. 700년 전의 이 그림, 현존하는 우리나라 인물화 중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명종 임금이 직접 써서 내려보낸 ‘소수서원(紹修書院)’ 현판 글씨도 전시하고 있다.

소수박물관에는 이밖에도 지역 기증자들의 유물과 이 지역의 선사시대, 삼국시대 그리고 불교문화와 금성단, 김흠조 유물은 물론 유교의 전래와 성리학의 발달 과정을 한 눈에 알 수 있게 꾸며놨다. 소수서원을 비롯한 서원과 향교의 관한 다양한 자료도 전시하고 있어 명실상부 ‘한국 유학의 메카’로 명성을 높이고 있었다.

박물관 뒤쪽으로 잠시 걸어가면 영주선비촌이 자리하고 있다.

한국인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해 온 유교사상을 조선시대 선비정신을 통해 재무장, 윤리도덕의 붕괴와 인간성 상실의 오늘날 사회를 되짚어 볼 수 있게 재현해 놓은 선비촌이다.

해우당고택, 만죽재 등 영주지역의 대표적인 반촌 무섬마을의 고택을 이곳에 재현한 기와집 7채와 초가 5채, 당시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정자, 누각, 디딜방아, 대장간, 저자거리, 주막, 외양간 등 사라져간 모습들을 고스란히 보고 체험할 수 있게 해놨다.

선비촌 답게 이곳엔 수신제가(修身齊家), 입신양명(立身揚名), 거무구안(居無求安), 우도불우빈(憂道不憂貧) 등 4구역으로 조성해 놓았다. 선비의 정신이 그대로 묻어나는 말들이다. 부자가 아니어도 좋다. 가난해도 자기 수양이 먼저다. 벼슬길에 욕심을 내서는 안된다. 그리고 만사 편리함만 추구해서도 안되며 순응하며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고 있다..

기와집과 초가집은 ‘ㅁ’자 집, ‘ㅡ’집 등 집집마다 구조가 달라 그 차이점을 느껴보는 것도 재밌다.

골목에 아련한 추억 속의 해당화가 활짝 피어있었다. 필자에겐 정말 추억 속의 꽃이다. 진분홍색의 큰 꽃잎,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 같았다. 고향마을 시냇가 모래톱 근처에 피었던 기억이 난다. 책보자기 어깨에 매고 꽃향기 맡아보던 까까머리 10대 시절의 풍경이다. 꽃을 보는 순간 문득 이미자의 ‘섬마을 선생님’ 노랫말들이 생각났다. ‘해당화, 섬마을, 철새, 총각선생님, 열아홉살 섬색시, 순정, 사랑, 그리움, 별, 바닷가…’ 이 모두 향수를 자극하며 필자에게 ‘더 느리게 살라’는 메시지를 주는 것 같았다. 그래 더 천천히 걷자. 그리고 느껴보자.

작은 다리를 건너면 저자거리다. 이곳에서는 하루 숙박하며 선비촌을 체험할 수 있는 명소다. 외국인들도 부러워하는 한국의 선비촌이다.

수라간, 종가집, 뜨라네, 찻집, 인삼주막집…집집 마다 솜씨자랑에 듣기만 해도 침이 넘어가는 장터다. 선비이어도 좋고 아니어도 좋다. 오늘 하루 마음껏 먹고 즐겨보자. 단, 몇 백년 전 선조들의 느낌으로라면 더 좋겠다. …………………… ■ 동국도학(東國道學)의 흐름 :

1. 공자 : 구 유교 집대성 2. 주자 : 주자학(신유교) 3. 안향 : 고려시대 때 주자학 첫 도입 4. 정도전 : 조선 개국 통치이념으로 삼음 5. 주세붕 : 계승 발전(서원 창건) 6. 이황 : 전성기(성리학)

■ 팔불출ㆍ줄행랑 : 유학의 고장 영주 순흥에서는 예로부터 갖가지 말들이 생기기도 했다.

소수서원에서 공부하던 유생들이 성적이 나쁘면 강학당에서 나가야 하는 규칙이 있다. 사서오경, 즉 9과목 중에서 8과목에 ‘불(不)’ 등급을 받으면 나가야 한다. 그래서 이를 ‘팔불출(八不出)’이라 불렀다. 성적이 나빠 낙오된 사람을 뜻했다. 오늘날에도 팔불출은 ‘좀 모자라거나 못난 짓을 하는 사람’에게 쓰고 있다.

또 순흥지방엔 99칸 짜리 방을 가진 대저택들이 많기로 유명한 곳이다. 집의 규모가 크다보니 종들이 거처하는 행랑채 역시 수십칸짜리가 많았다. 비오는 날 종들이 비를 피해 줄지어 늘어선 행랑채를 따라 졸졸 뛰어다니며 심부름하곤 했는데 이를 ‘줄행랑’이라고 불렀다. 요즘은 꽁무늬 빼고 달아난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 “나는 ‘처사(處士)’가 되고싶다” : 조선 최고의 학자 퇴계 이황 선생이 임금의 온갖 벼슬 하사도 거부하며 되고 싶어 했던 ‘처사’. 처사가 뭐길래?

처사란 조선 중엽 붕당정치가 활개칠 때 중앙정치를 단념하고 시골에 은거하며 후학을 양성하던 선비를 말한다. 돈과 권력과 명예를 버리고 학문과 후학에 정진하며 청렴하게 산 선비다.

힘 좀 쓴다는 사람들이 조정에서 패거리를 형성하고 반대파를 몰아내 죽이던 시대, 각종 사화(士禍)도 많이 일어나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유배가거나 목숨까지 잃은 신하, 선비들이 많았다.

주로 어린 왕이 등극했을 때 외척 세력과 조정의 간신들이 의기투합, 나라 걱정에 입바른 소리하는 신하를 모함하고 조정을 좌지우지하자 뜻있는 선비들은 환멸을 느껴 벼슬길을 사양했다. 그러나 이들은 낙향해 살면서도 항상 나라를 걱정하며 수많은 의병을 양성하기도 했다.

을사사화 때 모함을 받아 삭탈관직 당한 퇴계 이황 선생도 중종-인종-명종-선조로부터 부름을 받아 몇 차례 조정에 들어갔으나 스스로 벼슬을 포기하고 지방 군수로 나선 후 낙향, 후학양성에 일생을 보냈다. 그는 수십번 왕의 부름을 거부하기도 했다.

퇴계 선생은 평소 처사가 되길 원했다고 한다. 자신이 죽으면 비석에 이 ‘처사’란 글자가 들어가길 원했다.

옛말에 “왕비 배출한 집안보다 대제학 배출한 집안이 낫고, 대제학 보다 문묘배향자 배출한 집안이 나으며, 문묘배향자 보다 처사 배출한 가문이 가장 영예스럽다”고 했다.

그러나 퇴계는 처사가 될 수 없었다. 단양군수와 풍기군수 등 관직을 갖는 바람에 꿈을 이루지 못했다.

대표적인 처사로는 남명 조식(曺植) 선생이 있다. 그리고 화담 서경덕(徐敬德)도 이름을 올린다.

글ㆍ사진=남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