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통 · 금융업계도 병폐 개선 잇단 동참
물량 떠넘기기·납품단가 후려치기 대기업-협력사 불공정거래 다반사 과도한 매장 인테리어 공사 요구 등 대형유통사-중소 입점업체 갈등도
농협중앙회·현대百·신한銀 등 갑·을 명칭 바꾸기 운동 잇따라 롯데마트 “우리는 항상 乙입니다” 사업장마다 글귀 새긴 캠페인도
욕설과 막말로 점철된 음성 파일이 동영상 공유 사이트 유튜브에 올라왔을 때만 해도 ‘갑(甲)-을(乙)’의 병폐에 대한 비판이 이처럼 일파만파로 번지리라고 예상 못했다.
남양유업이 대리점주들에게 일명 ‘밀어내기’라 불리는 강압적인 물품 떠넘기기를 자행했다는 정황이 확인되고, 공정거래위원회가 ‘밀어내기’에 대한 실태 조사에 나서겠다고 하자 식품업계 전체가 얼어붙었다. “식품 업계에서 ‘밀어내기’가 없는 곳은 없어요”. 당시 한 업체 관계자가 한 자조섞인 말이 국내 산업계의 비뚤어진 갑을 관계를 단적으로 입증했다.
갑과 을 사이의 불공정한 거래는 주로 본사와 협력사의 관계에서 발생해왔다. 대표적인 사례는 납품단가를 ‘후려치는’ 것이다. 최근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대기업 납품단가가 적정하지 않다고 답한 업체가 전체 응답 업체의 54%에 달한다.
표면적으로는 대기업이 발주한 경쟁 입찰에서 협력업체가 써낸 단가를 보고, 낮은 단가를 낸 업체를 택하는 식이다. 그러나 정작 협력업체들은 보이지 않는 압력 때문에 터무니없이 낮은 단가를 쓸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입찰 업체들이 제시한 단가가 마음에 안 들면 타당한 이유 없이 계속 재입찰을 시키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제 살 깎아먹는 식으로 입찰가를 낮출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IT강국의 기반을 만든 소프트웨어 업계에서도 잘못된 갑을관행이 횡행하고 있다. 지난달 한국SW산업협회의 실태조사에서 중소업체의 56.9%가 공공기관 등 발주처의 ‘갑질(갑의 잘못된 행태를 꼬집는 말)’을 겪었다고 답했다. 발주처가 낙찰이 이미 끝난 다음에 단가 인하를 요구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낙찰이 끝났다 해도 발주처에서 “더 낮은 단가를 제시한 업체가 있다”며 단가 인하를 슬쩍 내비치면 중소 업체에서는 어쩔 수 없이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다.
대형유통사와 중소 입점업체 간의 관계도 전형적인 갑과 을이다. 2010년부터 뉴코아아울렛 일산점에서 피부관리실을 운영해온 김수옥(53) 씨는 3년여 동안 아웃렛 운영사인 이랜드 측과 갈등을 겪었다. 이랜드 측이 수차례나 과도한 매장 리뉴얼을 요구했고 자사 계열 프랜차이즈 운영도 강요해, 한때 김 씨는 울며 겨자 먹기로 점포를 3개나 떠안아야 했다. 공정위의 조정을 거쳐 점포는 1개로 줄였지만 지난 4월 초 뉴코아가 김 씨의 피부관리실을 없애기로 했다며 일방적으로 퇴점을 통보해, 다시 공정위 측 조정을 받고 있다.
프랜차이즈 본사와 가맹점 사이에서는 무리한 ‘밀어내기’나 인테리어 공사 요구 등이 대표적인 ‘갑질’로 꼽힌다. 프랜차이즈 업태는 가맹점이 생길 때마다 가맹비를 받고, 이후 가맹점에 공급하는 제품의 물류비로 본사가 수익을 내는 구조다. 가맹점이 계속 늘지 않는 한 수익이 제자리걸음을 할 수밖에 없다. 수익에 급급한 프랜차이즈 본사는 물류비를 늘리기 위해 가맹점에 과도하게 물량을 공급하는 ‘밀어내기’를 자행하거나, 인테리어 리뉴얼을 핑계로 가맹점에 인테리어 비용 부담을 요구하게 된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지난 4월 가맹점 사업자에게 점포 이전이나 확장을 강요했다는 이유에서 파리크라상에 시정명령과 함께 5억7200만원의 과징금을 부과하기도 했다. 공정위 조사 결과, 파리크라상은 2008년부터 2011년 사이에 30개 가맹점 사업자에게 점포를 확장하거나 인테리어를 바꾸지 않으면 사실상 가맹계약을 갱신하지 않겠다고 통보해 가맹점주들에게 인테리어 공사를 강요한 것으로 나타났다.
비뚤어진 갑을관계가 다시 조명되면서 이를 개선하고자 하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 ‘갑’ ‘을’ 등 명칭을 바꾸는 일부터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다. 농협중앙회는 지난 10일 계약서에 ‘갑’과 ‘을’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겠다고 밝혔다. 신한은행 등 금융권에서도 계약서상 ‘갑’ ‘을’ 명칭을 쓰지 않겠다는 곳이 많아지고 있다.
현대백화점도 계약서에서 ‘갑’, ‘을’이란 표현을 쓰지 않겠다고 지난달 밝혔다. 롯데마트는 아예 ‘우리는 항상 을(乙)입니다’라는 글귀를 사업장마다 새겨놓는 ‘을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아직 갑을관계가 동등한 협력관계로 나가려면 갈 길이 멀다는 지적이다. 동반성장위원회는 지난달 74개 기업을 상대로 지난 한 해 동안 조사한 동반성장지수를 발표했다. 74개 기업 중 8개 기업이 사실상 꼴찌인 ‘개선’ 등급을 받았다. 동반위는 향후 대상기업을 109개사로 늘리고 1차 협력사도 동반성장지수 조사에 포함시키겠다고 밝혔다. ‘을’의 설움을 ‘병’에게 전가하는 악습까지 감시하겠다는 것이다.
도현정 기자/
kate01@heraldcorp.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