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랑딸랑”. 회장님의 곁에는 언제나 정신없이 손을 흔들어대는 사람들이 있었다. 갑(甲) 앞에선 알아서 허리를 숙여야 한다. 오로지 ‘복종만이 살 길’. “회장님의 영원한 종”이라는 개그맨 김학래의 ‘씁쓸한 유행어’는 80년대식 풍자코미디였다. 30여년이 흐른 지금, 대중문화는 달라졌다. ‘을(乙)의 이야기’는 브라운관을 침범했다. 맞닥뜨린 현실은 비애로 가득 찼다. ‘그래봤자 영원한 을’이라는 현실은 희망도 앗아갔다. 그래서 울었고, 그러다 분노했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
“나 로또 맞았어. 토요일 밤 열시만 되면 로또용지가 이렇게 나와. 폐지가 1kg에 50원이니까 870원 번거야. 이 정도면 종이회사도 차릴 수 있겠다. ‘페이퍼 컴퍼니’. 세금은 얼마나 내면 되려나?”
한음 이혜석은 로또 한 장 살 돈도 없다는데, 유령회사 페이퍼컴퍼니에선 ‘세 회피’로 떠들썩했다. 갖는 것도 나누는 것도 ‘평등’과는 거리가 먼 현실, 지난 16일 방송된 KBS2 ‘개그콘서트’의 인기코너 ‘오성과 한음’은 우리 사회의 부조리를 정교하게 꼬집었다. 개그맨들은 끊임없이 현실을 끌어왔다. 무기력한 캐치볼을 이어가며 힘없는 서민들의 삶을 이야기했다. 집값이 자꾸 떨어진다는 한음 이혜석에게 오성 김진철은 “집이 남향이야?”, “요새 남양 인기없대”라고 답한다. 남양유업 사태였다.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 사태는 “그랩(Grab), 그랩(Grab)”이라는 짧은 대사로 풍자했다.
풍자가 스토리를 만날 땐 대중의 공감대가 커졌다. 드라마 ‘직장의 신(KBS2)’은 IMF 이후 비정규직 노동자 800만의 현실을 정조준했다. 계약직이기에 담배 심부름이 일쑤였고, 정규직을 위협하는 인재일지라도 기획아이템은 번번히 빼앗겼다. 직장 안의 을들은 ‘먼지같은 존재’이고, ‘노예같은 삶’을 살다갈 뿐이었다. 수퍼맨처럼 등장한 미스김은 통쾌한 대리만족을 안긴 ‘을의 반란’이었다.
MBC ‘무한도전’의 ‘무한상사’ 편은 정리해고 칼바람 현실을 묵묵히 견뎌야하는 가장의 비애를 다루더니, 곧 ‘갑의 횡포’를 폭로했다. 정리해고를 당한 정과장(정준하)은 연탄불 계란후라이로 홈쇼핑까지 입성했다. ‘웬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났다’. 대기업인 전직장 ‘무한상사’의 동료들과 홈쇼핑에서 승부를 벌여야 하는 상황. 방송에서는 홈쇼핑에 만연한 과장광고 등 불공정 거래 행태를 무한상사를 통해 풀어냈다. 거대기업의 파수꾼들은 자영업자 소시민을 무시하고 홀대했다. 동네빵집을 위협하는 ‘갑의 횡포’였다.
브라운관을 덮은 을의 이야기는 곧 대중의 이야기였다. 만년 을의 한숨과 눈물은 거대권력 앞에서는 번번히 무기력해졌다. SBS 드라마 ‘너의 목소리가 들려’는 형평성과 공정성 앞에서 여지 없이 무너진 ‘디케의 저울’을 꼬집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강자의 몫, 그러면서도 “내 딸이 맞고 당신이 틀렸다”며 잘못된 판결을 내린 판사 앞에 목청 한 번 높여본다.
억울한 을의 분노가 공분을 일으킨 것은 SBS ‘그것이 알고싶다’의 두 편 ‘사모님의 이상한 외출(5월27일)’ 편과 ‘익산경찰서(6월15일)’ 편을 통해서였다. 철저한 갑의 위치에 놓인 거대권력의 횡포를 담은 두 편은 영남제분 불매운동과 사건의 재수사를 불러왔다. 대중문화의 힘이었다.
대중문화는 다시 희망을 이야기한다. 그것이 판타지일지라도, 잘못된 현실은 달라질 수 있다고 소망한다. “사람이면서도 사람이기를 포기하는 이들이 넘쳐나는 세상입니다. 탐욕과 거짓이 당연해지고, 부정부패와 모함이 떳떳해져가는 세상이에요, 그런 인면수심의 세상에서 여전히 사람이 되기를 소망하고 꿈꾸는 아입니다. 과연 그 아이가 꿈꾸는 사람이란 무엇일까 궁금하지 않습니까?(MBC ‘구가의서’ 이순신의 대사 중)”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을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 콘텐츠에 대해 “대중문화는 결국 대중과 관련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과거엔 한 가지 사안에 대해 의견을 내고, 일관된 목적의식을 갖고 이야기하는 공간이 없었지만 지금은 인터넷 생겼고, 소셜미디어가 정착돼 인식된 상태다”며 “작은 목소리도 모이면 큰 힘이 된다는 것을 대중은 알고 있다. 갑을 관계의 그릇된 현실에서 정서적으로 바로잡고 싶어하는 욕구가 등장했고, 그것이 결국 대중문화를 통해 나타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고승희 기자/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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