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서상범 기자]“일개 고등학교 교장을 무슨 인터뷰씩이나 하려고 그래요”
박경재(59) 한영외고 교장은 인터뷰 섭외차 전화를 건 기자에게 손사래부터 쳤다.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특별한 교장이다. 교육부 공직생활만 30여년을 한 교육행정의 달인이다. 수도 서울의 교육행정 2인자인 서울시 부교육감을 역임했고, 지성의 전당이라는 대학총장으로도 일했다. 일선 교장 중 이만한 스펙(?)을 가진 교장은 단언컨대 존재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다. 평생교육법, 한국어능력시험, EBS 수능방송 등 대한민국 교육사의 큰 틀이 된 정책들을 입안하는 등 우리나라 교육정책 역사의 산증인이기도 하다. 행정고시 출신 교육공무원으로 출발해 대학총장, 고등학교 교장 등을 역임하며 35년간 교육현장을 누비고 있는 그를 만나 숨은 사연을 들어봤다.
▶법관을 꿈꾸던 시골 촌놈, 운명처럼 교육계에 뛰어들다=박 교장은 스스로를 시골 촌놈이라고 불렀다. 그의 고향은 경남 밀양시의 한 산골이다. 마을사람이라고 해봐야 고작 50여 가구. 그는 차도 다니지 않는 산골 동네에서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암산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했던 그는 당시 최고 명문이던 부산 경남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전국의 수재들이 모인 경남고에서도 그는 항상 전교 20등 안에 들었던 우등생이었다. 얌전한 성격이었지만 그렇다고 공부만 죽어라고 한 책벌레는 아니었다. 야구로 유명한 경남고를 다녔던 덕에 자연스럽게 야구 등 운동을 즐기며 체력과 공부 모두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는 고교시절을 낭만이 있고, 정이 넘치던 시절이라고 회상했다. 이어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친구들과 갔던 무전여행을 소개했다.
“부산에서 남해, 진주를 거쳐 서울까지 다녀오는 여행이었죠. 몰래 기차를 숨어 타기도 하고, 차를 얻어 타지 못해 친구들과 밤길을 걷기도 했어요. 아마 그 시절이 아니면 두 번 다시 못해볼 경험이었습니다. 호기롭고 무서울 것이 없던 내 인생의 가장 빛나던 순간이었다고 생각해요”라며 그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러면서 그는 법관의 꿈을 키웠다. 어릴 적부터 집에서 법학도, 판사가 되길 원해왔고 유난히 법조계 인사가 많았던 밀양 출신이라는 점도 무의식 중에 법관의 꿈을 키우게 했다.
하지만 그토록 원했던 서울대 법대를 떨어졌고, 삼수를 해 서울대 사회계열에 입학했지만 대학 2년을 아마추어 야구팀에서 신나게 보냈다. 그러다 사법고시를 준비하려고 했지만 준비과목이 너무 많아 엄두를 못내다 경험삼아 응시한 22회 행정고시에 덜컥 합격하게 됐다.
그는 “인생은 정말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며 “당시만 해도 35년 넘게 교육계에서 일하게 될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그렇게 합격 후 처음 발령받은 부서가 경남교육위원회(현 경남교육청) 기획감사담당관실의 기획계장 자리였다. 당시 기획계장은 그야말로 한직으로 주요업무계획 수립 및 교육통계연보를 만드는 일 외에는 일이 거의 없었던 자리였다. 하지만 당시 이수동 교육감이 부임하자 상황은 달라졌다. 이 교육감은 기획계에 향후 4년간 추진할 주요업무계획을 수립하라고 지시를 내렸고 한순간에 전 직원들의 주목을 받는 부서가 됐다. 5개월 동안 주말도 반납하며 ‘알찬교육 바른생활’을 기본교육지침으로 하는 교육계획을 만들었다. 계획만 만들고 끝이 아니었다. 단위학교 추진 사항 등 관련지침을 만들어 각 학교에 배포하고, 시ㆍ군 지역교육청에 대해 심사분석 체계를 만들어야 했다. 그는 “초임시절 맡았던 이 일이 나 자신을 기획통으로 만들었다”며 “그야말로 맨 땅에 헤딩했던 그 경험을 바탕으로 무슨 일이든 일하는 것이 두렵지 않았고, 무슨 일이든 해 나갈 자신이 생겼다”고 말했다.
▶평생교육법, 한국어능력시험의 산파= 경남교육위원회 근무를 마치고 81년 8월 서울로 올라와 본격적으로 교육부 생활을 시작했다. 그 때부터 그는 일복도 터졌다.
교육부 사회교육과로 발령이 난 그에게 부여된 임무는 사회교육법 제정과 평생교육 진흥방안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80년 공포된 제5공화국 헌법에 ‘국가는 평생교육을 진흥해야 한다’는 조항이 신설되면서 관련 법안을 마련해야 했던 것이다. 사회교육법 주무사무관 자리를 받은 신출내기 공무원은 별을 보고 출근해 별을 보고 퇴근하는 생활을 반복해야 했다.
그는 “당시 독일과 일본 등 해외의 사회교육 관련 법령을 모조리 분석해 법안, 시행령 안 등을 만들었다”며 “82년 말 마침내 사회교육법이 제정, 공포됐을 때의 감격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 후 그는 해외유학프로그램을 통해 사회교육, 평생교육으로 유명한 매사추세츠대학교에서 교육학 석ㆍ박사 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 그가 선진교육 프로그램을 체험할 수 있게 했던 행운이었다.
이후 청와대 교육비서실 행정관을 거쳐 92년 유네스코 대표부 초대 교육관으로 임명된 그는 3년 반 동안 프랑스 파리에서 근무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우리나라가 제안해 문맹퇴치 사업에 공이 많은 개인이나 단체에게 매년 시상하는 유네스코 세종대왕상이 자리를 잡는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낯선 자리에서는 누구나 움츠리거나 수동적이게 마련이지만 그는 달랐다. 마치 세상을 처음 보는 호기심 많은 아이처럼 그는 낯선 업무와 역할에 빠져 들었다.
유네스코 대표부에서 경험을 쌓은 덕분에 그는 귀국과 동시에 교육부 국제교육협력과장으로 발령받았다. 여기서도 최초가 되는 일을 맡는 그의 징크스는 계속됐다. 하지만 방식은 달랐다. 앞서 평생교육법이 정부시책에 의해 맡겨진 일이라면 이번에는 스스로 일을 벌인 것이다. 박 교장은 당시 각 국 대사들과 교육부 장관간 면담과정에서 대사들이 공통적으로 건의했던 한국어 능력시험 도입을 준비했다.
1년 정도의 준비기간을 거쳐 한국어능력시험은 97년 제 1회 시험이 시작됐고 지금은 전 세계 60여 개국에서 응시할 정도로 인기가 높아졌다. 이후 그는 97년 대구교육청, 2002년 경기도교육청 부교육감을 역임하며 지방교육과 관련 현안을 다뤘다.
▶EBS 인터넷 수능강의 시작, 그 숨 가빴던 30일=EBS 인터넷 수능강의. 2004년 첫 강의가 시작된 인터넷 강의는 수능시험의 70% 이상을 인터넷 강의내용에서 출제한다는 정부 방침과 함께 이제 수험생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됐다. 그는 이 EBS 수능강의의 시작에도 깊이 관여했다.
그는 이 당시를 지난 35년간의 교육계 경력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으로 기억했다. 국가 교육의 근간이 된 사업을 진행했다는 자부심도 있지만 시스템의 구축과정에서 말 그대로 전쟁을 치렀기 때문이다.
2004년 2월 경기도 부교육감을 마치고 교육부 국제교육정보화국장으로 발령을 받은 그에게 주어진 현안은 EBS인터넷 수능강의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내 그는 당황했다. 2004년 ‘2ㆍ17 공교육 정상화를 통한 사교육비 경감대책’을 발표하고, 10대 과제 중 핵심 단기과제인 EBS 수능강의를 4월 1일 개통된다고 발표까지 난 상황이었지만 추진된 것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EBS에 사업 예산배정조차 안된 상황이었다.
곧바로 예산배정부터 들어간 그에게 더 큰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교육학술정보원(KERIS)에 있는 서버를 활용해 동영상 강의를 송출하려던 계획이 처음부터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KERIS는 일반 서버만 있을 뿐 동영상을 송출할 수 있는 서버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문제가 알려진 뒤인 2004년 3월 2일. 당시 노무현 대통령에게 교육부의 2004년도 주요업무계획을 보고하는 자리에서 노 전 대통령은 “자기 일에 책임지는 공무원이 없어요. 책임감 있게 몸을 내던져서 일을 하다 잘못되면 그만 둘 각오를 하고 일을 해야 하는데, 그런 사람이 없습니다. 특히 교육부 공무원이 더합니다. EBS에서 사교육비 절감을 위해 인터넷을 이용한 수능강의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는데, 수능강의 동영상을 수험생들에게 보낼 동영상 서버가 없다는 게 사실인가요?”라며 강하게 질책을 했다. 그는 당시 노 대통령의 질책이 있고 난 뒤 회의장 분위기는 살얼음판갔았다고 회상했다. 업무보고를 마친 후 교육부는 그야말로 쑥대밭이 됐다. 당시 안병영 교육부총리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EBS 수능강의 시스템을 4월 1일에 성공적으로 개통시켜야 한다고 강조했고 차관은 이번에 EBS 수능강의시스템을 성공적으로 구축하지 못하면 교육부 국장급 반 이상은 옷을 벗어야할 것이라고 비장하게 말했다. 교육부의 EBS 수능강의시스템 구축을 위한 한 달간의 전쟁은 그렇게 시작됐다.
이후 수차례 전문가 회의를 통해 EBS에 직접 10만 명이 동시에 시청할 수 있는 동영상 서버를 새롭게 구축하는 방법 외에 다른 방도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어느 정도 서버의 윤곽이 나오자 또 다른 과제가 튀어나왔다. 전국 2000여 고등학교에 어느 정도 용량을 수용할 수 있는 인터넷 회선을 깔아야 할지? 장애학생들은 어떻게 할 것인지? 동영상 강의는 누가하며, 녹화는 언제 해야 하는지? 교재는 누가 언제까지 만들어야 하는지? 교재 가격은? 그 중에서 가장 큰 문제는 인터넷 대란에 대한 우려였다. 당시 진대제 정보통신부 장관은 10만 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동영상 서버가 운영되면 우리나라 전체 인터넷이 마비되는 인터넷 대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부랴부랴 정보통신부 공무원들도 참여하는 인터넷담당 TF가 구성돼 문제를 겨우 해결했다. 그는 마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문제를 파악하고, 관계자들과 협의해 업무를 분담ㆍ지시ㆍ체크했다.
개통 하루 전인 3월 31일까지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설치예정인 동영상 서버 중 마지막 11대가 미국에서 31일 오후에야 도착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생길 착오에 대비해 관세청, 출입국관리국 등 관계기관에 협조를 구하고, LG 회장의 전용기를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대기시켜 31일 오후 서버를 무사히 들여와 마지막 서버의 설치를 마칠 수 있었다. 그는 “인터넷 강의가 처음 송출되던 그 날의 감동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라며 숨 막혔던 한 달을 회상하며 아직도 떨림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교육 최일선에서 다시 교육을 생각하다=이처럼 대한미국 교육사에 길이 남을 굵직한 일을 진두지휘한 그가 바라보는 고교 교육 현장은 어떤 것일까? 그는 “비단 한영외고 뿐 아니라 부교육감, 교육부에서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면서 가장 중요하다고 깨달은 것이 바로 ‘학생 중심 교육’”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우리나라 전체의 교육청사진을 놓고 일을 하다 보니 자칫 교육의 주체인 학생들이 외면되는 경우가 있었다”며 “학교의 중심, 교육의 주체인 학생들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고 그는 말했다.
학생들에게 무엇보다 ‘자존(自尊)’을 강조한다는 그는 “학생들 스스로 자기 자신에 대해 믿음을 가져야 비로소 잘할 수 있는 것을 찾을 수 있고, 또 그래야만 자신만의 영역을 개척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그러한 자존감을 고취시켜주는 중요한 존재가 바로 학교이고, 스승이라고 강조했다.
자존을 바탕으로 자신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삶의 학습현장이 곧 학교이며, 선생님들은 그런 학생들이 학교안에서 행복하게 지낼 수 있도록 지켜주고 돕고, 감동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라는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라는 시를 사랑한다고 소개했다.
“학생들을 오래 보고, 자세히 보는 스승이 되기 위해 매일 고민하고 노력하고 있답니다”
교육계의 굵직한 현안을 진두지휘했던 산증인이자, 초심을 잃지 않는 교육자, 박경재를 지켜보는 게 흐뭇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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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재 교장 프로필
부산경남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심리학학사
부산대학교 행정대학원 행정학석사
매사추세츠대학교 대학원 교육학석·박사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국가정책과정 수료
몽골국립사범대학교 명예박사
1978년 제22회 행정고등고시 합격
경남교육위원회 기획계장
대통령비서실 행정관
주유네스코대표부 교육관
교육부 교육정보기획과장
대구광역시 부교육감
경기도 부교육감
교육부 국제교육정보화국장
서울특별시 부교육감
동우대학 총장
2012~현재 한영외국어고등학교 교장
2012~현재 세종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좌교수
1988년 대통령 표창
2004년 홍조근정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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