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 되기 위해서는 능력있는 삼촌의 도움이 절실했다. 하지만 왕이된 지금 삼촌은 걸림돌일 뿐이다. 12일 전격적으로 사형을 집행한 김정은과 사형장 이슬로 사라진 장성택의 이야기는 ‘토사구팽’ 그 자체였다.

장성택은 죽은 김정일의 여동생 김경희의 남편으로 김정은의 고모부다. 함경남도 문천군 출신으로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하고 1969년에는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유학했다. 김경희와 만난 것은 대학 때로 장인인 김일성은 둘의 교제에 반대해 장성택을 원산 농과대학으로 쫓아내기도 했다. 하지만 둘은 1972년 결혼했고, 이후 장성택은 ‘로열 패밀리’로 외화벌이에 앞장섰다. 1977년 보통강 구역에 ‘피로회복관’을 지어 매형 김정일에게 바친 것은 ‘로열 패밀리’로 살아남기 위한 그의 노력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다.

이런 노력에도 장성택의 ‘로열 패밀리’ 생활은 그의 죽음 만큼이나 파란만장했다. 1978년에는 동평양 외교부 초대소에서 열린 연회를 이유로 강선제강소로 쫓겨나기도 했다. 당시 2인자였던 매형 김정일이 장성택의 ‘파벌 만들기’를 의심한 결과다.

장성택이 다시 북한 권력 중앙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0년이 지난 1989년 평양세계청년학생축전때다. 장성택은 이 대회를 준비하는 평양 재건설 사업을 맡았고, 대회 후 김정일은 ‘노력 영웅’으로 칭하며 3대혁명소조부장,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등에 기용했다.

하지만 그를 향한 견제는 계속됐다. 2004년 측근의 호화 결혼식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분파 조장’ 딱지를 달고 실각했다. 그의 측근이던 최룡해 현 군 총정치국장도 당시 함께 낙마했다. 이와 관련 북한 소식통들은 당시 또 다른 실세 리제강과 파벌 싸움에서 밀린 것이 실질적인 장성택 실각 이유고, 2010년 리제강의 교통사고는 역으로 장성택의 작품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2번이나 숙청당한 장성택이 부활한 것은 역시 ‘로열 패밀리’의 힘이였다. 2006년 중앙에 복귀한 장성택은 김정은 후계 다지기 작업에 앞장섰다. 김정일 장례식 운구차에서 그의 자리, 또 김정은 등장 이후 그에게 붙여진 화려한 직함은 그가 ‘장인-매형-조카’로 이어진 왕 만들기에 큰 역할을 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장성택의 운명도 여기까지였다. 피가 섞이지 않은 가족의 도움에 왕이된 김정은은, 언젠가 자신을 위협할 수도 있는 ‘1등 공신’, ‘로열 페밀리’의 득세를 두고보지 않았다. 김정은은 그에게 ‘반당반혁명종파행위자’ 딱지를 붙여 완전히 제거했다. 이 딱지는 앞서 장성택 낙마의 명분이였던 ‘파벌 만들기’, ‘분파 조장’과 같은 내용이다. 돈과 권력을 움켜진 ‘킹 메이커’는 절대 권력자에게는 언제나 눈에 가시였던 셈이다.

최정호 기자/


choijh@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