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정진영 기자] “끼니는 어김없이 돌아왔다. 지나간 모든 끼니는 닥쳐올 단 한 끼니 앞에서 무효였다. 먹은 끼니나 먹지 못한 끼니나, 지나간 끼니는 닥쳐올 끼니를 해결할 수 없었다”
김훈의 장편소설 ‘칼의 노래’는 전쟁 중이라는 절박한 순간에도 주린 배를 채워야 넣어야 하는 엄정한 끼니의 운명을 처절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지나간 끼니’가 채 식기도 전에 ‘닥쳐올 끼니’가 다가오는 세상이다. 지난 60년대까지 유효했던 보릿고개가 태산보다 높았다는 말은 이제 옛말을 넘어 전설에 가깝다. 먹다 죽은 귀신은 있을지언정 굶어 죽은 귀신은 드물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거리곳곳에 먹거리가 넘쳐나는 세상이다.
영국 사상가 조지 버나드쇼는 “음식에 대한 사랑처럼 진실된 사랑은 없다”고 했다. ‘인간에 대한 인간의 사랑이 영원한지를 확인하기엔 인간 생이 너무 짧다’는 말을 믿는다면 음식에 대한 사랑은 길고도 집요하다. 인간의 사랑이 꽂힌 곳에 문화는 더욱 화려하게 꽃필수 밖에 없다. 취향과 레시피의 발전도 변화무쌍하다. 음식도 패션처럼 트렌드에 민감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세상을 풍미한 혹은 풍미하고 있는 음식 트렌드들을 들여다보자.
▶ 불로장생의 꿈 ‘매크로바이오틱스’= 지난 60~70년대 미국의 히피와 뉴에이지 신봉자들 사이에서 ‘매크로바이오틱스(Macrobiotics)’ 운동이 유행했다. 몸과 환경은 하나라는 동양의 자연사상과 음양원리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이 운동은 무가공, 유기농, 몸에 좋은 통음식 먹기를 권장한다. 특히 이 운동은 가공식품과 설탕 첨가 식품을 철저히 피하고 유기농 곡류와 채식을 중심으로 식사를 하라고 말한다. 지금도 전 세계에 건강을 위해 이 운동을 실천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 식탁에서 시작하는 느린 삶 ‘슬로우 푸드’= ‘슬로우 푸드(Slow Food)’는 지난 1986년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음식 문화 개혁 운동이다. 피에몬테 주의 브라라는 작은 마을에서 시작된 이 운동은 미국의 패스트푸드문화에 대한 반발에서 촉발됐다. 맛의 획일화를 지양하고 지역 특성에 맞는 전통적이고 다양한 식생활 문화를 추구하자는 이 운동은 세계적으로 확산돼 현재 전 세계 50여개 국가에 7만여 명의 회원을 지닌 조직으로 커졌다. 이 운동은 식습관의 변화 촉구뿐만 아니라 대량생산 음식의 위험을 피하고 전통 음식 문화와 미각, 건강한 먹거리를 보존하자는 문화운동의 성격까지 포괄하고 있다.
▶ 잘 먹으면 잘 산다 ‘웰빙 푸드’= 경제적 풍요와 사회적 성공을 강조하던 80년대와는 달리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정신적 풍요와 자기만족이 삶의 중요한 척도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웰빙(Well-being)’은 이러한 의식과 구체적인 행동 방식을 총체적으로 가리키는 말이다. ‘웰빙 푸드’는 이 같은 삶의 일부로 ‘슬로우 푸드’와도 많은 교집합을 가지고 있다. 본래 ‘웰빙’은 고도화된 문명에 반발하는 미국의 중산층이 자연주의, 뉴에이지 문화 등을 받아들이면서 대안으로 선택한 삶의 방식이다. 2000년대에 들어와 국내에서도 ‘웰빙’ 문화가 본격화됐지만 본래 의도와는 달리 유기농이나 전통식만을 고집하는 상류층 문화로 왜곡된 경향이 없지 않다.
▶ 요리는 과학입니다 ‘분자요리’= 간장을 주사기로 흡입해 알긴산 성분을 포함한 물에 한 방울씩 떨어뜨리면 캐비아로 변신한다. 올리브 오일을 액화질소로 순간 냉각하면 새로운 맛과 질감의 아이스크림이 탄생한다. ‘분자요리((Molecular Cuisine)’는 ‘음식을 분자 단위까지 철저하게 연구하고 분석한다’는 의미로 붙은 요리 방식으로, 음식재료의 질감ㆍ조직ㆍ요리법 등을 과학적으로 분석해 변형시키거나 완전히 다른 스타일의 음식을 창조하는 것을 말한다. ‘분자 요리’는 요리 안에 과학과 예술을 모두 아우르며 음식 문화의 최전선에서 트렌드를 선도하고 있다.
▶ 튀고 싶다면 섞어라 ‘모디슈머’= 최근 MBC 예능 프로그램 ‘일밤-아빠 어디가’를 통해 ‘짜파구리’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짜파구리’는 농심의 ‘짜파게티’와 ‘너구리’를 함께 넣어 비벼먹는 음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같은 제조사의 ‘사천짜파게티’와 ‘너구리’를 조합한 ‘사천 짜파구리’도 등장했다. 또한 팔도 ‘비빔면’에 골뱅이를 ‘골빔면’, 참치를 곁들인 ‘참빔면’도 인기를 끌고 있다. 이처럼 제조사에서 제시하는 표준방법을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제품을 재창조해 내는 소비자를 ‘모디슈머(Modisumer)’라고 부른다. 지난해 11월 시장조사기관 AC닐슨은 ‘짜파게티’와 ‘너구리’의 매출합계가 전년 대비 17% 상승했고, 두 제품 모두 역대 최고 매출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모디슈머’들이 음식 문화를 넘어 시장을 움직이는 큰 손으로 자리를 잡았다는 사실을 보여준 사례다.
▶ 남이 먹는 모습도 즐겁다 ‘먹방’= 남이 음식을 먹는 모습을 쳐다보는 일은 추접스러운 행동으로 취급을 받아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다르다. 연예인들의 먹는 모습을 보여주는 ‘먹방(먹는 방송)’은 이제 인기 예능 프로그램의 단골 소재다. ‘먹방’은 예능 소재를 넘어 드라마의 주제로도 떠올랐다. tvN 드라마 ‘식샤를 합시다’는 그 대표적인 예다. 앞서 일본에선 중년 남자 주인공이 혼자 식사를 하는 장면으로 내용을 채우는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먹방’을 보여주는 예능 프로그램 시청자 게시판에는 “혼자 밥을 먹기 외로울 때 방송을 보며 음식을 먹는다”는 내용의 게시물이 적지 않다. 1인 가구의 증가가 불러온 새로운 음식 문화의 단면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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