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어느 날 박봉에 견디지 못한 한 시골판사가 사표를 들고 당시 대법원장이었던 가인(街人) 김병로를 찾아갔다. 가인은 “나도 죽을 먹고 있소. 조금만 참고 고생합시다”라며 만류해 그 판사의 사표를 돌려보냈다.
잉크병이 얼어붙을 정도로 춥다는 판사들의 호소에 가인은 영하 5도가 되기 전까지는 난방은 꿈도 꾸지 말라며 호통을 쳤다. 법원의 물품을 구입할 때 “다른 관청에서는 다 외제를 쓰는데 우리만 질나쁜 국산을 쓴다”는 직원들의 건의에는 “나라를 찾은 지 얼마나 됐다고! 관청에서 국록을 먹는 우리가 국산품을 쓰지 않으면 우리 산업은 누가 키우냐”며 타일렀다.
우리나라 판사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중 하나로 꼽는 가인 김병로(1888~1964)는 일제 강점기와 격동의 1950년대 법률가이자 정치인, 독립운동가로 청빈을 신조로 조국과 인권, 사법권의 독립을 실천한 시대의 ’변호인‘이었다. 13일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50주년이 되는 날이다.
김학준이 쓴 ’가인 김병로 평전‘에는 그의 ‘지독한’ 청빈이 잘 나타나 있다. “내가 기름을 때면 다른 법원장 관사에도 기름을 때야 한다”며 톱밥이나 연탄을 썼고 담배 한 개비도 두 토막으로 잘라 피웠다. 손잡이가 부러져 반 토막이 난 도장을 대법원장 도장으로 재임 기간 10여년 동안 사용했고 대법관에게 승용차를 주자는 건의에는 “법관이란 집에서 법원에나 왔다 갔다 하면 되는 것인데 차는 해서 무엇 하느냐”며 거절했다. 비싼 양복 대신 두루마기를 입었고 직접 점심 도시락을 싸 가지고 다녔다.
정부에서 내려온 예산도 돌려 보내며 허리띠를 졸라매는 데 앞장섰다.
가인이라는 아호도 일제 강점기 나라를 잃고 거처할 곳 없는 ‘거리의 사람’이라는 뜻으로 현실을 개탄하고 독립을 바라는 의미로 선생이 직접 붙인 것이다. 그는 일생동안 거리의 사람답게 낮은 곳에서 나라와 정의를 위한 길을 걸었다.
일제강점기에는 김상옥 사건, 의열단 사건, 6.10 만세 사건, 안창호 선생 사건 등 수많은 사건을 수임, 무료로 변호했다.
그 중 대한광복단을 결성하고 일제 독립운동 탄압의 본거지였던 서울 종로경찰서를 폭파한 김상옥 의사와 관련된 인물들에 대한 형사재판 변론은 유명하다.
당시 언론은 가인 선생의 변호에 대해 “조리가 있고 매우 열띤 변론”이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유조리(有條理) 최열렬(最熱烈)한 변론’이라고 소개했다.
가인 선생은 공판에서 “조선 독립을 희망하는 사상은 조선인 전체가 가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정치 변혁을 도모했다고 하여 처벌한다면 양민을 억지로 법의 그물에다가 잡아 넣는 것”이라고 일갈했다.
해방 후에는 우리나라의 최초의 대법원장으로서 민법, 형법, 형사소송법 등 기본 법률의 초안을 직접 담당해 사법부의 기틀을 마련하고, 법관들이 법과 양심에 따라 판결할 수 있도록 정치권과 경찰, 검찰 등의 권력으로부터 사법부의 독립을 지켜냈다. 이승만 대통령 앞에서도 당당했다.
1954년 독재를 연장하기 위한 명목으로 사사오입 개헌이 단행됐을 때는 “절차를 밟아 개정된 법률이라도 그 정신이 헌법 정신에 위배되면 국민은 입법부에 반성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며 절대권력 앞에서 꼿꼿이 맞섰다. 당시 그를 눈엣가시로 여긴 이승만 대통령이 사표를 요구하자 “이의 있으면 항소하시오”라고 응수한 일화는 지금도 유명하다. 요즘과 같은 ‘전관예우’도 가인과는 거리가 먼 얘기다. 일제의 탄압이 심해져 번호사업을 접고 1932년 낙향해서 해방될 때까지 그는 경기도 양주군에서 가족들과 함께 농사를 짓고 돼지와 닭을 키우며 살았다.
그는 판사 회의에서 “사법관으로서의 청렴한 본분을 지킬 수 없다고 생각될 때는 사법부의 위신을 위하여 사법부를 용감히 떠나야 한다”고 말했다. 1957년 대법원장 퇴임사에서는 ”정의를 위해 굶어죽는 것이 부정을 범하는 것보다 수만 배 명예롭다. 법관은 최후까지 오직 정의의 변호사가 되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민족시인 고 노산 이은상 선생은 가인 선생의 비문에 다음과 같이 썼다.
“무릇 시대의 탁류 앞에서는 세 종류의 사람이 나타나는 것이니 하나는 거기에 굴종하는 사람이요 또 하나는 피하여 숨어사는 사람이요 다음 하나는 그 탁류와 더불어 마주 싸우며 끝까지 지조를 굽히지 않는 사람으로 가인 김병로 선생이 그이시다. 그는 강직한 성격과 청렴한 생활로 일세의 스승이 됐다”
최상현 기자/
bonsang@heraldcorp.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