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국제시장’서 덕수役 맡은 황정민
서독 파견 광부·베트남전쟁 등 한국 현대사 굴곡 담아 아버지에게 바치는 헌사
복근 드러낸 20대 청년부터 70대 노인役 폭넓게 소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2006)이라는 일본 영화가 있다. 주인공 마츠코의 박복한 일생은 ‘역대급’이다. 어린 시절엔 아버지의 관심을 얻으려 예쁜 얼굴을 일부러 우스꽝스럽게 구겼고, 성장해선 사랑하는 남자들의 애정을 얻기 위해 분투했다. 돌아오는 것은 멸시와 폭력, 배신이었다. 그럼에도 마츠코는 ‘인생의 가치는 누군가에게 뭘 받았는 지가 아닌, 뭘 주었는 지에 있다’고 되뇌었다.
여기에 또 ‘다 괜찮다’고 씩 웃고마는 한 남자가 있다. 영화 ‘국제시장’(제작 JK필름ㆍ배급 CJ엔터테인먼트)의 ‘덕수’다. 그는 ‘가족을 지켜달라’는 아버지의 부탁을 가슴에 새긴 채, 서독의 탄광과 베트남의 전쟁터까지 날아가 몸이 부서져라 일한다. “이제 당신의 인생을 살라”는 아내의 말에도 “다 팔자대로 사는 것”이라고 자조할 뿐이다.
덕수와 마츠코, 너무도 다른 두 영화의 주인공들이지만 이들의 긍정성과 고단한 인생은 묘하게 닮았다. 배우들의 대체 불가능한 존재감도 닮은꼴이다. 나카타니 미키가 ‘원맨쇼’에 가까운 연기로 혼을 빼놓는다면, 황정민은 우리시대 아버지의 얼굴로 관객들을 웃고 울린다. 게다가 그는 어떤 시대에 서있어도 이질감이 없이 녹아든다. 고단해 보이지만 강인한, 무심한 듯 속정 깊은 우리네 아버지를 황정민이 아닌 그 누가 이처럼 사실적으로 그릴 수 있을까.
#.“영자씨, 앞으로는 혼자 울지는 마이소”(첫눈에 반한 영자에게 김치찌개를 끓여다주며 덕수가 하는 말)
‘국제시장’은 ‘해운대’(2009)로 천만 감독이 된 윤제균 감독이 5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다. 전작의 성공 후 영화계 관계자들의 수많은 눈이 쏠린 가운데, 윤 감독은 일말의 고민 없이 ‘황정민’을 주연으로 지목했다. 20대의 첫사랑을 연기하면서도 국민 아버지처럼 보일 수 있는 배우는 황정민이 유일했던 것. 황정민도 ‘아버지에 관한 영화’라는 이유 만으로 흔쾌히 부름에 답했다.
“한국영화에 왜 아버지 얘기가 별로 없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었어요. 아버지라는 존재가 남자들에게 주는 큰 먹먹함이 있거든요. 대본을 읽고 참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나요. 촬영에 들어가선 아주 평범한 아버지처럼 보이기 위해 고민을 많이 했죠. 제가 평범한 외모라도 연예인이다보니 관객에게 괴리감이 느껴질 수 있는데 그러면 안되겠다 싶었어요.”
앞서 윤 감독은 황정민을 ‘40대에도 로맨스가 되는 배우’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황정민은 “저야 땡큐”라고 너스레를 떨면서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워낙 좋아한다. 멜로를 늘 찍고 싶어하고 나이를 먹어도 멜로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털어놨다.
그는 ‘국제시장’도 결국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라고 덧붙였다. 전쟁 통에도 사랑은 꽃 핀다고 하지 않던가. 6.25 전쟁과 피난, 분단 등 제 한몸 가누기 어려운 일들이 꼬리를 무는 시대에도, 남녀 간의 사랑,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은 유유히 그 밑바닥을 흘러왔다.
“사실 ‘신세계’ 같은 영화는 우리가 겪어보지 않은 상황에서 흉내내는 정도일 수 밖에 없어요. ‘사랑’이라는 건 누구나 느껴봤고 가장 잘 아는 거잖아요. 나이를 먹어도 멜로를 찍고 싶다고 하는 게, 감정 표현할 때 가장 재미있고 관객들과 소통하기 좋은 주제라서 그래요.”
#.“이 세상 풍파를 우리 자식이 아닌 우리가 겪은 게 참 다행이라고”(베트남에 파견 근로 중인 덕수가 영자에게 보내온 편지 중)
황정민의 멜로에도 눈길이 가지만, ‘국제시장’의 관전 포인트는 따로 있다. 40대의 황정민이 20대 청년부터 70대 노인까지 연기한다는 점이다. 청년 시절의 에피소드에서 그의 복근은 CG의 도움을 받은 결과물이다. 일부러 몸을 만들어 스크린에서 남성미를 뽐내는 배우들도 많은데, 황정민은 큰 고민 없이 기술의 힘을 빌렸다.
“영화 ‘전설의 주먹’을 찍을 당시 몸을 만들 때 너무 힘들었어요. 40대에 몸을 만든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니예요. 그렇다 보니 노출이 있는 작품은 웬만하면 하지 말아야지 생각했어요. 촬영 기간에 매일 운동하다 보면 역할에 집중하기도 힘들고, 몸에 치중하다보니 스트레스도 받게 되더라고요.”
젊은 시절은 비교적 수월하게 넘어갔지만, 문제는 70대 노년의 연기였다. 누군가는 ‘그냥 분장하면 되는 거 아닌가’라고 고개를 갸웃하겠지만 베테랑 배우에겐 간단치 않은 일이었다. 우선 ‘70대의 덕수’가 만들어진 세월을 유추해 캐릭터를 잡아야 하는 것이 까다로웠다. 이후에도 ‘노인 연기’가 아닌 ‘노인’처럼 보이기 위해 해결해야 할 난제가 여럿 있었다.
“덕수의 걸음걸이나 손 동작, 다리를 다쳐서 절뚝대는 것 등 디테일을 살리는 게 어려웠어요. 분장으로 대신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잖아요. 다행히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 당시 70대 돈키호테 역을 맡아서 그 때 연구했던 자료들이 도움이 많이 됐어요. 파고다공원에 가서 노인들에게 걷기 편한 신발부터 어떤 속옷을 입는 지까지 물어봤죠.(웃음)”
#.“아부지, 내 이만하면 잘 살았지예?”(노년의 덕수가 아버지 사진을 보며 하는 말) 완벽한 연기를 위해 노력하는 것과 별개로, 황정민은 ‘안 되는 것을 억지로 되게 하는 것’을 싫어한다. 세월이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외모를 선호하는 것부터, 자신과 맞지 않는 작품과 캐릭터에 욕심 부리지 않는 것, 의지로는 어쩔 수 없는 대중적 인기에 휘둘리지 않는 것 등이 그랬다.
“어렸을 때 영화 ‘피아노’를 보는데, 남녀 주인공의 정사 신에서 하비 케이틀의 배가 불룩 나온 게 눈에 들어왔어요. 전 그걸 보면서 아름답다고 생각했죠. 그러면서 깨달은 게 배우는 나이답게 굴어야 한다는 거예요. 외적인 것보다 정신적으로 잘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잘 산다는 건 결국 ‘눈’(眼)이 말해주더라고요. 배우라면 눈이 더 초롱초롱하게 빛나야 하지 않을까요.”
그는 아직 ‘천만 배우’ 타이틀을 얻지 못한 것에도 초연한 모습을 보였다. 과거 연극 무대에 설 당시 관객이 없어 공연을 못 하기도 했고, 관객이 너무 많아서 돌려보낸 적도 있었다. 희비를 다 겪어보니 흥행 성적표에 크게 연연하기 않게 됐다.
“물론 ‘국제시장’이 제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큰 흥행 성적을 거두지 않을까 기대해요. 하지만 솔직히 제 몫은 아닌 거죠. 영화 판에서 각자의 몫이 있다고 생각해요. 배우는 촬영이 끝나면 ‘안녕’ 하는 거고 홍보할 때 또 열심히 하는 거죠. 배우로서 내 몫을 다한 다음엔 지켜볼 수 밖에 없어요. 남은 건 관객들의 몫이죠.”
이혜미 기자/사진=박해묵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