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재재단 문화유산방문캠페인
백제고도의길 익산-부여-공주를 가다
고백도시 익산, 선화공주 발자취 찾기
왕궁리유적 5층석탑 1400년 시간여행
과학적 수로, 일본이 배운 정원 배치
미륵사지 연못에서의 ‘반영’ 촬영 인기
15년 발굴, 유리구슬 등 2만3천점 출토
가람 문학촌, 아가페 정양원의 휴머니즘도
“익산 소왕릉의 주인이 선화공주이길..”, “정치혼란만 없었으면, 서동-선화는 성남대군-청하 처럼, 아가페정원 산책로의 MZ세대 연인들 처럼, 서로 사랑하며 슈룹(우산)이 되어주었겠지?”
‘고백도시’ 익산은 백제고도이자 사랑의 상징 고을이다. 문화재청과 한국문화재재단의 ‘문화유산 방문캠페인’ 10개 코스 중, 익산 미륵사지~왕궁리~공주 공산성~마곡사~부여 부소산성~나성~논산 돈암서원을 거치는 ‘백제 고도의 길’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3가지를 포함한다. 헤럴드경제는 익산시, 지엔씨21, 한국문화재재단과 함께 백제고도의 길을 탐방하며, 문화유산으로 더욱 두툼해지는 여행길을 따라가 보았다.
수은주가 갑자기 내려간 12월초, 무왕(서동)이 22담로 백제대제국의 부활을 꿈꾸며 새로운 수도로 건설한 익산 왕궁리는 5층석탑이 자리를 지킨 채, 화려한 전각들이 서 있던 빈터에 옷깃을 여미게 하는 찬바람이 감돌았다.
선화공주 혹은 좌평 사택적덕의 딸이 입었을지도 모를, 분홍색 백제 여인의 복색을 한 이채원 해설사가 여행기획자 전계욱 지엔씨21 대표와 함께, 빈 터에 우뚝 솟아 백제 고도의 상징처럼 남아있는 5층석탑을 바라본다.
▶되살아나는 왕궁리 왕의 정전= 산천은 의구하되 호화로웠던 궁궐은 간데 없지만, 이 해설사는 조심스럽게 우리를 1400년전 그곳으로 데려다 주었고, 간 데 없는 전각들이 우리앞에 하나 둘 세워진다. 왕궁리, 미륵사지 답사가 끝나면, 다시 21세기로 돌아와 황등육회비빔밥, 어르신들을 치유한 하트요새 아가페 정원, 김대건 신부가 상륙한 성당포구 바람개비길의 낭만이 기다린다.
왕궁리유적은 무왕이 639년에 건립한 제석정사(帝釋精舍), 관궁사·대궁사지, 대궁이 자리하던 토성터이다. 폭 3m, 동서 245m, 남북 490m의 장방형 담장, 왕의 통치공간 정전 건물지 등 14개의 건물지가 그 흔적을 명확히 남기고 있었다. 백제 최고의 정원유적과 금, 유리, 동 등을 생산하던 공방지, 물을 지혜롭게 이용했던 수로, 백제 수세식 화장실 유적도 확인된다. 부여 관북리 도성과 규모가 비슷한데, 익산 왕궁리는 철저한 계획도시라고 한다.
남측 집무-생활공간, 북측 후원지역이 1:1 비율이다. 남측 공간은 4단의 석축을 쌓아 4개의 공간으로 구획했는데, 대략 2:1:2:1의 비율을 보인다. 비례개념 등 다 치밀한 계획이 있었던 것이다.
후원에는 조경용-생활용 U자형 환수구와 곡수로가 1400년 모습 대로 남아있다. 후원 소나무 숲은 요즘 문화유산 관리 직원들이 잠시 쉬는 휴게터가 되었다. 서편 아래쪽 길이 10.8m, 폭 1.8m, 깊이 3.4m의 수세식 화장실엔 백제복색을 한 남성 밀랍인형이 내부를 들여다보는 여행자의 시선에 당황해 하는 표정을 짓는다. 구곡으로 궁안을 휘감아 흐르는 물은 위생적인 뒷처리를 가능케 했다.
▶정부인 선화의 기록, 중앙목탑에?= 이곳에서 5㎞ 북쪽에 있는 금마면 기양리 미륵사지의 자태는 여전히 근엄하나, 두 손 꼭 잡은 연인들의 인생샷 촬영지, 부모의 손을 잡은 아이들의 산책길이 되었다. 문화유산 방문객들은 연못에서 물의 반영을 활용해 두 탑, 버드나무, 동반자를 촬영하는 것 부터 시작한다.
미륵사지는 백제 최대의 사찰로 30대 무왕(600~641년)에 의해 창건됐다. 중문-탑-금당이 일직선상에 배열된, 이른바 백제식 ‘1탑-1금당’ 형식의 가람 세 쌍을 나란히 병렬시켜 여느 사찰의 3배라는 점을 강조한다. 베스트 오브 베스트라는 것이다.
중앙 목탑과 금당은 간데 없고, 백제 창건당시에 세워진 미륵사지 서탑(국보) 1기, 석탑의 북쪽과 동북쪽 건물들의 주춧돌과 통일신라시대에 사찰의 정면 양쪽에 세워진 당간지주 1쌍(보물 236호)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2009년 서탑 해체 복원과정에서 건축기록물 사리봉영기가 나온다. 그런데, 무왕의 부인이 ‘좌평 사택적덕의 딸’이라고 적혀있는 것이 아닌가.
마동(서동=무왕)과 선화공주의 로맨스가 깨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 무렵, 사학계에선 정부인(선화공주)의 기록물은 중앙목탑에 있었을 것이라는 일리있는 추론이 나온다. 물론 이미 도굴된 이후라 확인할 길은 없었지만, 지금 많은 국민은 이런 추론이 진실이기를, 무왕릉(대왕릉) 인근 소왕릉에 선화공주가 묻혀있기를 바라고 있다.
▶왕실 아웃사이더 무왕, 금 캐서 정치자금?= 삼국유사는 ‘신라 선화공주와 혼인한 후 왕이 된 서동 부부가 용화산(미륵산) 사자사의 지명법사를 찾아가던 중, 그때 갑자기 연못 속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나, 이 못 상당 부분을 메우고 세 탑-금당, 회랑을 세웠다’고 적고 있다.
15년간 이어진 발굴작업 끝에 무려 2만3000여점이 출토됐는데, 당시 금 보다 몇 배 더 비싸다는 구슬이 대거 확인돼 로마제국형 글라스, 자바섬 유리구슬 기술을 백제 역시 공유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미륵산의 최정상부 두 봉우리를 잇는 능선엔 미륵산성이 조성돼 있다. 계곡부를 감싼 포곡식 산성이다. 산성의 둘레는 1822m에 이르며 10개소의 치(雉)와 동문지·남문지·옹성이 남아 있다.
성으로 가는 길은 경사가 좀 있는 산책길이다. 고조선 후기 준왕의 새 거점지라는 뜻에서 기준성이라고 물리는 이곳은 왕건이 후백제의 신검과 견훤을 쫓을 때 신검의 항복을 받은 곳이라고 전해진다.
익산 토성은 금 다섯개라는 뜻의 오금산성(五金山城)이라고 불린다. ‘서동이 사가에 머물때 어머니를 지극히 효성스럽게 섬겼는데, 마를 캐다가 다섯 냥의 금을 얻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돈이 중앙정치무대에 비주류 왕손인 본인의 존재감을 각인시킨 정치 밑천이 됐다는 분석은 이채롭다. 이곳은 지난해 시민과 여행객의 산책길로 탈바꿈한다. 해질녘 실루엣이 여행자를 배우로 만든다.
왕궁리유적에서 동쪽으로 7㎞ 떨어진 곳에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식물원,놀이터 왕궁포레스트가 들어섰다. 1300평대의 아열대 식물원과 갤러리 카페, 힐링 족욕, 넓은 잔디 정원의 숲 놀이터까지, 자연 속 휴식 공간이다. 완만한 경사의 유아용 클라이밍 놀이터, 착한 아이에게 선물을 주려고 옥상에 힘겹게 올라가는 산타크로스 할아버지 조형물이 이채롭다.
▶가랑 이병기 생가의 낭만= 술복-난초복-제자복을 3복으로 여긴 자연주의-휴머니즘 시조시인 가람 이병기의 낭만적인 생가 수우재와 가람문학관은 빼놓을 수 없는 익산 내 우정과 평안의 여행지이다.
가람문학관은 한국 근현대 시조와 국문학을 대표하는 가람 이병기의 업적과 정신을 기리기 위해 2017년 10월 개관했다. 가람 이병기 선생은 익산 출신으로 우리의 말글과 문화를 지켜내고 시조를 현대적으로 부흥시킨 시조시인이자 국문학자이다.
전라북도 기념물 제6호로 지정된 가람 이병기 선생의 생가 ‘수우재’ 옆에 자리 잡은 가람문학관은 연면적 996㎡ 지상 1층 규모로 생가의 경관과 조화되도록 설계되었으며, 주요 시설로는 가람과 마주하기(영상실), 가람의 시조 음미하기(가람실), 가람의 생애 되짚기(상설전시실), 가람 기억 가져가기(체험실), 천호산 말길(세미나실), 문필봉 글줄(문인실), 용화산 능둠(휴게실)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가람의 시조 음미하기(가람실)’는 가람의 시조를 영상과 낭송 및 도폭을 통해 새롭게 접근해볼 수 있도록 꾸며놓았으며, 가곡으로도 유명한 가람의 시조 〈별〉을 초저녁 밤하늘의 분위기 아래 들어볼 수 있다. ‘가람의 생애 되짚기(상설전시실)’에는 시대의 격변 속에서 우리 것을 소중히 지켜나간 가람의 삶을 시조 혁신(시조시인), 고전 발굴(서지자), 국문학 정립(국문학자), 제자 양성(교육자)과 한글 수호(한글운동가), 가람일기(활동 기록가) 등의 순으로 배치해 이해를 돕는다.
▶여산 숲정이 순교성지= 호남의 관문으로 일찍이 천주교가 전래되어 수많은 신앙 공동체와 순교자들이 여산에서 나왔다. 1866년 대원군의 쇄국 정책과 천주교 말살 정책으로 시작된 박해는 1868년에 이르러 가장 치열하였다. 병인박해(1866년)가 일어났을 당시에 금산, 진산, 고산에서 잡혀 온 신자들이 순교한 곳이며 기록은 22명이 순교했지만 훨씬 더 많은 순교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866년 당시에는 주로 전주에서 처형되었고 1868년에는 여산에서 처형이 이루어졌다. 여산 성지는 1868(무진)년 박해 때의 순교성지로 전주 교구 제2의 성지이다. ‘여산 순교 성지’라고 쓰인 대형 돌판이 있으며 그 안쪽으로 백지사 기념비가 서 있다. 순교자들의 무덤은 천호산 기슭 천호 공소 부근에 자리하고 있다.
이 순교자들은 숲정이와 장터에서 참수형 혹은 교수형으로 처형되었고 동헌(지금의 경노당) 뜰에서는 얼굴에 물을 뿌리고 백지를 겹겹이 덮어 질식시켜 죽이는 백지사(白紙死) 형이 집행되었다. 옛 동헌 뜰에는 당시의 박해 사실을 증명하듯이 대원군의 척화비가 서있다.
병인박해 당시 여산 지역의 천주교 순교사건은 조선 후기 천주교 전라도 전래과정을 중심으로 한 천주교 역사뿐 아니라 조선 후기 전라도 지역 사에도 의미 있는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여산 숲정이 순교성지는 여산면 소재지에서 여산고등학교 방향으로 500m정도 떨어진 논 가운데 위치하고 있다. 순교성지 내에는 순교상과 십자가 안내판, 화장실, 주차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철망으로 담장이 둘러져 있다.
익산에는 이밖에 하트(♥) 모양의 아가페정양원 수목공원, 여산 숲정이 순교성지와 척화비가 이건된 여산동헌, 김대건 신부의 해외서품 이후 첫 상륙지 나바위성당과 성당포구 바람개비 길, 익산근대역사관 등 인문학 여행지가 많다.
함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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