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값매각 국내특허 되레 국내기업 공격
5년간 국내기업 대상 특허소송 543건
‘사나포선 전략’ 확대에 대응 골머리
기업간 맞대응땐 진흙탕 싸움 가능성
# 국내 한 부품회사가 무선충전 사업에서 철수하면서, 2021년 유럽 특허관리금융회사(NPE)인 스크래모지에 무선충전 관련 특허 123건를 약 50억원에 매각했다. 스크래모지는 이 특허로 미국·독일·일본에서 삼성전자에 소송을 잇달아 제기했는데, 관련 요구 금액이 수천만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전해진다. ‘헐값’에 매각한 국내 특허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다시 국내 기업을 공격하는 ‘불방망이’가 된 것이다.
삼성전자 등 글로벌 시장을 선도하는 국내 주요 기업이 정보기술(IT) 수익을 전략적으로 노린 NPE 등 ‘특허 괴물’의 족쇄에 묶여 경영 리스크가 커지고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글로벌 인플레이션이 지속되고, 내년 경제 성장 가능성에 대한 비관론이 우세해지는 상황에서, NPE의 특허소송 남발로 국내 기업들의 고민이 한층 깊어지고 있다.
▶NPE의 한국 기업 대상 특허소송 해마다 증가...‘사나포선’ 전략 확대=30일 특허청에 따르면 2018년부터 올해 7월까지 약 5년간 미국에서 NPE가 한국 기업을 상대로 제기한 특허소송은 총 543건에 이른다. 특허소송 분석업체인 RPX 인사이트에 따르면 최근 5년간 미국 연방지방법원에서 삼성전자가 NPE로부터 피소당한 건수는 총 208건에 달한다. 2018년 37건을 비롯해 ▷2019년 47건 ▷2020년 32건 ▷2021년 52건 ▷2022년(10월 기준) 40건 수준이다.
노키아, 에릭슨, 브리티시텔레콤 등 해외기업이 주요 사용하던 특허전략인 ‘사나포선(Patent Privateering)’이 국내에도 뿌리내리고 있는 것이다. 사나포선 전략은 기업이 보유 중이던 특허를 NPE에 매각하고, 클레임이나 소송 등으로 고액의 합의금, 손해배상금이 확보되면 이를 분배해주는 방식을 뜻한다. 최근 사모펀드, 로펌 등 관련 이해관계자가 확대되면서 특허 관련 합의금 요구액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합의금 대부분을 특허권자가 아닌 투자업체가 가져간다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최근 NPE가 대형 헤지펀드 등의 풍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공격적으로 소송을 진행하는 추세이기 때문에 소송비, 합의금 등 비용 뿐 아니라 증거 제출, 증인 출석 등 소송 대응 업무 역시 기업에 큰 부담이 되고 있다. 특허권도 재산권이기 때문에 NPE에 매각해 수익화할 순 있다. 그러나 최근 사나포선 전략을 통한 특허 소송은 산업계는 물론 소비자 경제에도 부정적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분석이다. 기업의 고액 합의금, 손해배상액, 천문학적인 소송 비용 등이 최종적으로 제품가격에 반영돼 결국 소비자의 혜택이 줄어들 수 있다는 평가다.
과거 기업간 특허소송에서는 협상을 통해 ‘크로스 라이선스(별개의 특허권을 소유한 두 당사자가 상호 개별 사용을 허용하는 합의)’를 맺거나 적정 수준의 합의금을 주고받으며 분쟁을 해결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기존의 경쟁 업체간 특허소송과 달리, 개발·제조·판매 등 실체가 없는 NPE는 협상없이 곧바로 소송을 통해 판매금지를 유도하거나 과도한 금액을 요구한다. 이로 인해 상대기업의 경영 리스크를 과도하게 가중시키고 있다.
▶국내기업간 ‘진흙탕 싸움’ 가능성도 커져=사나포선 전략은 특허제도 취지에 반하는 것으로 지적된다. 특허 제도의 목적으로 거론되는 발명의 보호·장려와 산업 발전 등에 기업들이 나서지 않을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사업철수 또는 경영악화가 예상되는 기업이 사업분야의 특허를 매각해 최대한 수익을 낼 순 있으나, 이 과정에 NPE가 개입하면서 당초 매각 의도와 무관하게 무분별한 소송이 남발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특허 분쟁 대신 ‘특허 평화’를 원하던 상대 업체가 똑같은 사나포선 방식으로 반격할 수 있어 국내 기업간의 진흙탕 싸움 가능성 역시 거론된다. 실제 최근 일부 정부 출연연구기관 등에서도 사나포선 전략을 추진하고 있어 법적 분쟁 확산 우려가 커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특히 정부 예산을 지원받은 출연연구기관으로부터 인텔렉추얼 벤처스 등 다수의 NPE가 특허를 양도받아 이를 국내 기업 대상 소송을 제기하며 수익화 역시 추진하고 있다.
이로 인해 일각에선 해외 NPE 등에게 특허를 매각해 국가 핵심 기술 유출 등 국가 경쟁력이 약화되는 사례가 발생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통신 표준, 방송 규격 등 정보통신기술(ICT) 분야의 특허를 저렴한 가격에 인수한 해외 NPE가 삼성, 현대차, LG 등 국내 대기업뿐 아니라 중소·중견기업을 대상으로도 특허소송을 내고 고수익을 노릴 가능성 크다는 설명이다.
앞서 한 출연연구기관은 2008년 특허전문관리기업인 SPH 아메리카에 이동통신 관련 특허를 양도했다. 2012년 미국 특허전문관리기업인 인텔렉추얼 벤처스에 다수의 특허를 양도해 수익화했다. 2021년 안승호 전 삼성전자 IP센터장이 설립한 ‘지코아’에 디지털 방송 규격 관련 특허 800여건을, 145억원에 매각했다.
지식재산전문변호사인 최승재 세종대 법학부 교수는 “한국, 대만 등 IT 기술이 강한 기업이 모인 국가 위주로 NPE가 특허 기술을 확보해 소송을 제기하고 있다”며 “NPE가 특허 권리를 행사할 순 있겠지만, 권리를 남용하지 않는 선에서 적절히 행사되도록 법제화 하거나 법집행을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지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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