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모음곡 ‘고예스카스’ 발매

23일부터 전국 7개 도시 리사이틀

오래 간직한 꿈이었다. “늦가을이었나, 초겨울쯤이었나. 꽤 추운 날이었어요. 이 음악을 들으며 카네기홀에 햇빛이 내리쬐는 따뜻함을 느꼈어요. 음악을 통해 다른 세계로 다녀올 수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꼈어요.” 언젠가는 꼭 연주해보고 싶다는 마음을 ‘숙제’처럼 품었다. “그로부터 몇십 년이 흘렀네요.” 어느덧 40여년이 지나 있었다.

피아니스트 백건우(76)가 스페인 작곡가 엔리케 그라나도스(1867~1916)의 피아노 모음곡 ‘고예스카스’를 담은 음반으로 돌아왔다. 그는 음반 발매 당일 기자들과 만나 “음악을 공부하다 보면, 인생에 있어 예술적으로 중요한 순간들이 있는데, ‘고예스카스’를 만난 때가 그런 날이었다”고 떠올렸다.

엔리케 그라나도스는 스페인의 민족음악을 낭만적이고 따뜻한 선율로 그려낸 작곡가다. ‘고예스카스’는 그라나도스가 스페인 화가인 프란시스코 고야의 전람회를 본 후 영감을 받아 음악으로 옮긴 작품이다.

이 곡을 음반으로 담기까진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고예스카스’에 닿기 위해, 백건우는 아주 먼 길을 오래도록 걸었다. 피아니스트로 활동한 지난 66년 동안 무수히 많은 작곡가와 함께 했다. 프란츠 리스트로 낭만주의 피아니즘의 정수를 들려줬고, 라벨과 함께 프랑스 음악의 아름다움을 그려갔다. 바흐부터 베토벤, 브람스, 슈만, 프로코피예프까지 시대를 초월한 끊임없는 시도와 도전은 그에게 ‘건반 위의 구도자’라는 수사를 안겼다. 이 음반은 백건우가 걸어온 음악 여정의 ‘새로운 이정표’이기도 하다.

그는 “음악인으로 이때까지 생활해오며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것 같다”며 “뉴욕에서 활동하던 젊은 시절 한국의 위상은 지금과 달랐고, 한 개인이 세계 음악계와 싸우기엔 벅찬 날들이었다”고 지난 시간을 떠올렸다.

“나의 음악을 쌓아가고 발표하는 것, 음악인으로 살아남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니었어요.”

음악가로서 커리어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순탄할 리는 없다. 그는 “때로는 (준비가 충분치 않은) 짧은 시간에 새 곡을 연주해야 하고, 잘 맞지 않는 지휘자와도 연주해야 했다. 불가능한 스케줄도 해야 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점이 많았다”고 했다. 긴 길의 끝에 만난 것은 ‘자유’였다.

“이제는 음악을 하면서 좀 즐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느 정도 마음의 자유를 찾은 것 같기도 하고, 그게 필요한 것 같기도 하더라고요. 나이가 들면서 음악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친해지고 있어요. 이젠 서로가 서로에게 좀 더 후해지고, 음악이 나를 받아주고, 나도 음악을 받아주는 그런 느낌이에요.”

백건우의 ‘고예스카스’는 온전히 자신의 감정과 이야기에 집중한다. 아름답고 색채감이 그려지는 음악은 빼곡히 채워진 음표로 피아니스트를 괴롭힌다. 백건우는 “그라나도스의 독특한 피아니즘으로 어려움이 있다”며 “그라나도스는 가볍게 치는 편이지만, 난 이 음악에서 감정이 굉장히 두텁게 와닿았다”고 말했다. 음반엔 표지부터 속지까지 백건우가 스페인에서 찍은 사진이 빼곡히 채워졌다. “한 때는 피아노를 치지 않고, 사진가가 되고 싶었다”고 한다. 피사체를 담을 때에도 백건우는 음악을 하듯이 “주제를 생각하고”, “어떻게 찍어야 할지 콘셉트를 정하고” 셔터를 누른다. 그는 스스로를 “굉장히 시각적인 사람”이라며 “음악을 하면서도 (눈으로 그려지는) 색채가 중요하다. 그림의 구도가 음악의 구성과 굉장히 가깝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음악으로 그리는 ‘백건우와 그라나도스-고예스카스’는 오는 23일부터 서울, 경기, 강릉, 울산 제주 등 전국 7개 도시 리사이틀로 만날 수 있다. 리사이틀은 인터미션 없이 하나의 호흡으로 이어진다. 음악은 “피아노로 치는 오페라와 같아 스토리를 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라나도스의 음악은 다채롭고 화려하고, 세련되면서도 감정 표현에 있어 자유로워요. 보다 인간적이고, 즉흥적이고, 감성적이고, 열정적이에요. 스페인 사람들이 그렇잖아요. 저한테도 새로운 경험이었어요. 연주를 하면서 스페인 음악이 우리와는 거리가 있는데 얼마나 잘 소화할 수 있을까 고민을 했어요. 갑자기 플라멩코 댄서가 될 수는 없잖아요. 내가 느끼는 것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옳은 해석이라고, 그렇게 마음을 먹게 됐어요. 그 길밖에는 없는 것 같았어요.”

고승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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