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솔지·남재국·류세일·박은경 인터뷰
2일 ‘말린 고추와 복숭아향 립스틱’ 개막
1인4역 역할놀이…옷 벗으며 배역도 버려
“가부장제와 퀴어 서사 속 나의 이야기”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젊은 남녀의 헌팅 장면. “제가 튕기는 여자예요.” (김솔지) 웃겨야 사는(?) 두 배우, 또 시작이다. 천연덕스럽고 뻔뻔하게, 입으로 주고받는 ‘예측불허의’ 공놀이가 시작된다.
“뭉티기 먹으러 가자.”
‘추파를 던지는 남자’ 류세일이 툭 던진다. 0.01초의 간극도 허락하지 않고, ‘튕기는 여자’가 받는다. “저 채식주의자예요.” 대본에도 없는 말들이 튀어나온다. 무대 뒤에서 이 장면을 지켜보던 남재국은 ‘웃참’(웃음 참기)의 연속이다. 애드리브는 T.P.O(시간·장소·상황)를 지키고, 지역 특색을 반영한다. 대전에선 ‘성심당’이, 거창에선 명승지 ‘수승대’가 소환된다. ‘뭉티기’는 연극 ‘말린 고추와 복숭아향 립스틱’의 대구 공연에서 등장했다.
“상의라는게 일절 없거든요. 무슨 말이든 툭 던지면 솔지 누나가 뭐든 받아줄 거란 믿음이 있어요. 그렇게 딱 맞아떨어질 때, 그 순간 너무 행복하죠.” (류세일)
이번 행선지는 서울 마포다. 남재국은 “한 달 동안 어떤 애드리브가 나올지 기대된다”고 했다. 김솔지가 힌트를 흘린다. “을밀대 어떨까 봅니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마포의 평양냉면 맛집이다.
연극창작집단 공놀이클럽의 네 배우 김솔지(39)·남재국(33)·류세일(35)·박은경(36)은 무대 위에서나 아래에서나 ‘패스 플레이’의 달인이다. 어떤 공을 던져도 기어이 몸으로 받아내니, 넷이 모인 자리는 이보다 더 떠들썩할 수 없다. 집 앞 골목에서 규칙 없이 공을 차듯 연극을 만든다는 ‘공놀이클럽’, 이름 그대로다.
‘말린 고추와 복숭아향 립스틱’의 초연(2024) 이후 내내 무대를 지켰던 터줏대감들의 마지막 무대가 시작된다. 개막을 앞두고 마포아트센터에서 만난 네 배우는 “이 무대는 네 가족의 서사가 마당에 고추 말리듯 여기저기 덕지덕지 널려 오감을 건드리는 축제”(김솔지)라고 했다.
대진표 따라 사발타기하듯...정형 깬 110분의 ‘역할놀이’
지난 2010년 재개발을 앞둔 서울 은평구 수색동 수정빌라. 집안의 유일한 자랑, ‘무려’ 서울대에 다니는 장남 ‘규빈’, 지방대 치대에 붙어 ‘이놈의 집구석’을 떠나는 게 목표인 ‘은빈’, 남편의 부재와 시어머니의 구박으로 자기연민에 갇힌 엄마 ‘미희’, 이 집의 절대 권력자인 할머니 ‘복자’가 있다. 가족의 평온(?)을 깬 건 자꾸만 사라지는 복숭아향 립스틱. 은빈이 오빠 규빈의 정체성을 알아채며 집안엔 균열이 생긴다.
연극은 공놀이클럽을 만나 낯선 옷을 입었다. 네 명의 배우는 고정된 배역 없이, 네 인물을 번갈아 연기한다. 딸은 아들이 되고, 엄마가 됐다가, 할머니가 된다. 이들에겐 성별도, 나이도 무대 뒤에서 숨 가쁘게 갈아입는 의상 한 벌과 함께 순식간에 지워진다.
류세일은 “낭독공연 당시엔 나이대에 맞는 배우들이 각자 역할을 맡았다”면서 “하지만 일반적인 드라마 형식으로 가면 공놀이클럽의 색깔이 살지 않을 것 같았다”고 돌아봤다. 그의 이야기에 김솔지는 “소수의 배우가 돌아가면서 역할놀이를 해보자는 연출(강훈구)의 고민에서 출발했다”고 설명했다.
배역은 연기 스타일이나 배우의 이미지와 완전히 상관없이 정했다. 철저한 물리적 계산을 바탕으로 대진표를 짰다. 박은경은 “무대 뒤 ‘퀵 체인지’ 동선이 꼬이지 않는 것을 염두했다”며 “‘네 배우 모두 규빈과 은빈을 최소 한 번씩은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고 귀띔했다.
물론 고민도 적지 않았다. 류세일은 “처음엔 남자인 내가 여성과 트랜스젠더를 온전히 소화할 수 있을지 우려가 됐다”며 “하지만 할머니 옷을 입는 순간 관객들은 할머니가 아닌 걸 알면서도 받아들인다. ‘놀이의 룰’을 재밌어한다는 것을 알고 난 이후 편해졌다”고 했다. 흡인력 높은 희곡과 공놀이클럽의 재기발랄이 만나자 110분의 연극은 시종일관 통통 튄다.
“어릴 적 소꿉놀이할 때는 성별 안 따지고 ‘나 이번엔 아빠, 나 이번엔 엄마’ 하겠다고 하잖아요. 의상을 입고 무대로 뛰어나가는 놀이성 자체가 즐겁더라고요.” (김솔지)
다만 무대 뒤 현실은 1분 1초가 치열하다. 박은경은 “아무리 연습해도 퀵 체인지에선 한 번씩 엉킨다. 구두가 신겨지지 않아 신으면서 나와야 하는 날도 있다”며 “가쁜 호흡과 조급함을 안고 무대에 올라가는 순간은 매번 떨린다”고 고백한다.
말려 들어간 어깨, 틀니 빠진 턱…신체로 맞춘 동기화
집안의 편애를 받으며 성장한 규빈이 장남의 굴레와 퀴어의 정체성 사이에서 갈등하고, 양보와 홀대가 일쑤였던 딸 은빈은 아들밖에 모르는 ‘집구석’이 신물이 난다. 수정빌라 203호 사람들은 가족이지만 각기 다른 마음과 사연을 품었다.
규빈의 뼈대를 세운 남재국은 그를 “장남이자 집안의 유일한 남자로서 ‘착한 아들’의 틀에 갇혀 온 인물”로 봤다.
“규빈이 트랜스젠더의 삶을 사는 것, 정체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나’로 온전히 살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라고 생각했어요. 나를 누군가에게 설득할 필요도, 이해받을 필요도 없는, 또 인정받을 필요도 없는 그저 있는 그대로의 나로 온전히 살아도 아무 문제가 없는 그런 세상과 삶을 원한다고 생각했죠.” (남재국)
흥미로운 것은 자리를 바꿔 앉을 때다. 배역이 바뀌면 인물을 보는 눈도 달라진다. 극 초·중반 규빈을 연기하는 남재국이 중반 이후 은빈이 되자 ‘규빈’을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규빈 탓에 은빈이 아르바이트에서 잘리게 되는 장면에서다. 그는 “그전까진 규빈으로서 은빈에게 고마워했는데 은빈이 돼 마주하니 ‘왜 이렇게 자기밖에 모를까’ 싶어 혼란스러웠다”고 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전쟁을 거쳐왔기에 생존이 목표인 할머니 복자”(류세일), “시어머니를 모시며 쌓인 한과 서울대에 들어간 아들에 대한 집착으로 뭉친 미희”(김솔지),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으면서도 규빈과 연대”(박은경)하는 은빈을 연기하며 네 배우는 가족의 결핍을 각각 나눠 짊어진다.
일종의 1인 4역 ‘역할놀이’엔 철저한 ‘동기화’가 필요했다. 공놀이클럽의 다른 작품처럼 ‘자기소개’로 시작되는 연극은 1장에서 각 인물을 처음 맡은 배우가 캐릭터의 기본값을 만들었다. 규빈은 남재국, 은빈은 박은경, 엄마 미희는 김솔지, 할머니 복자는 류세일 등이다. 네 사람이 각 인물 고유의 특징을 세우면, 다른 배우들이 제스처와 말투를 복제하듯 흡수했다.
남재국의 규빈은 “안으로 잔뜩 말려 들어간 소극적인 어깨와 오른팔을 감싸 쥔 왼손, 머리를 자주 만지는 행동”이 시그니처가 됐다. 박은경은 “방어적인 짝다리와 팔짱, 댓발 나온 입술”로 은빈을 시각화했고, 김솔지는 “방문판매원 특유의 접객용 미소와 건조한 손을 시종 비비는 습관”을 설정했다. 류세일은 친할머니에게서 힌트를 얻었다. 그는 “할머니가 손도 안 대고 틀니를 뺄 때면 턱이 쑥 들어가고 아랫입술이 처지곤 했다”며 “그 모습을 떠올려 복자를 만들었다”고 했다. 김솔지는 “세일만의 복자를 아직도 똑같이는 못 한다”며 “몇 번이나 대사를 녹음해 달라고 해서 듣고 연습했다”고 귀띔했다.
네 사람의 무대는 변신 로봇 4종처럼 일사불란하게 맞물리고, 유체이탈하듯 기민하다. 순식간의 ‘모드 전환’에도, 무대 위 네 배우는 삐그덕대지 않는다. 찰떡같이 소화하는 1인 4역에 관객들의 멱살을 잡고 혼을 뺀다.
“인물을 연기할 땐 그 인물만 생각하지만, 무대 밖으로 나와 옷을 벗는 순간 그 인물을 다 벗어던져요. 다음 인물로 바로 나가야 하기 때문에 신체 동기화가 먼저 돼 있어야 옷을 입는 순간 그 인물이 덧씌워지거든요.” (김솔지)
짐승 같은 감각과 ‘절차탁마’…100% 신뢰의 패스 플레이
‘척하면 척’이다. 눈빛까지도 필요치 않다. 뒤통수만 봐도 서로를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다. 최소 5년, 몸을 부대끼며 서로를 익혔기에 누구보다 서로의 강점을 잘 안다. 시종 조롱과 디스를 오가면서도 마음속 깊이 동료로서 깊은 존중을 품었다.
남재국은 류세일의 “확신을 가지고 뛰어드는 짐승 같은 본능”을, 박은경의 “연극에 미친 사람의 디테일”에 감탄한다. 류세일은 “박은경의 작품을 대하는 바른 자세”와 “끝까지 파고드는 남재국의 집념”을 본받고 싶다고 한다. 김솔지에 대해선 이구동성 “배우가 천직을 넘어 문화재급”이라고 말한다. 박은경은 네 사람을 두 갈래로 나눴다.
“저와 재국이는 가진 게 많지 않다고 느껴서 ‘절차탁마(切磋琢磨)’의 성실함과 지구력으로 기본을 지켜요. 반면 세일이와 솔지 언니는 마당놀이에 특화된 사람들처럼 유연해서, 돌발 상황이 생길 때마다 해결해 줘요. 꼼꼼한 사람과 수습하는 사람이 섞여 조화롭다고 느껴져요.”
네 배우를 주축으로 한 공놀이클럽 미학의 근간은 ‘놀이’다. 무대 아래에서 강훈구 연출은 입버릇처럼 ‘연기하지 말라’는 말을 반복한다.
남재국은 “처음엔 정말로 그냥 놀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 더 집요하게, 확신을 가지고 알 수 있어야 어떤 상황에서도 유연하게 놀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했다. 김솔지는 “다른 곳에선 연기하려고 애쓰는데, 여기선 잘 짜인 무대가 아니라 자연스럽고 러프하게 만드는 재미가 있다”고 귀띔했다.
잘 노는 네 배우에게도 무대는 늘 두려움이다. 즉흥과 약속의 경계를 넘나들고 허무는 자유분방함 때문에 박은경은 도리어 “두려움은 날이 갈수록 지독해진다”며 고개를 저었다. 류세일 역시 “관객을 만나는 것은 늘 두려운 일”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들은 두려움마저 끌어안았다. “두려움이 없는 순간이 더 위험하고 생각해요. 근거 있는 자신감은 근거가 사라지면 함께 사라지지만, 근거 없는 자신감은 사라질 리가 없잖아요. 빠그라질지언정 자신감 없이 들어가지 않는 것, 그게 관객에 대한 제 예의예요.” (류세일)
연극은 오는 25일까지 20여일간의 여정 이후 네 배우를 떠난다. 초연 당시 백상예술대상 젊은연극상, 서울예술상 ‘심사위원 특별상’ 등을 받은 잘 만든 연극은 앞으로 새로운 배우들과 만나게 된다. ‘말린 고추와 복숭아향 립스틱’의 마지막 놀이를 앞둔 ‘원조 배우’들은 이 연극을 “모두의 성장통”(남재국)이자 “누구나 자기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는 나의 이야기”(박은경)라고 했다.
“마지막에 규빈이가 집을 나설 때 비로소 진짜 이야기가 시작돼요. 연극이 끝나고 극장을 나설 때, 스스로 깨지 못했던 무언가를 깨고 나오는 ‘새로운 시작’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류세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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