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까지 국립무용단 신작 ‘더블빌’

안무가 차진엽 ‘몽유도원무’

안무그룹 고블린파티 ‘신선’

각자의 존재와 이름값의 증명 

국립무용단과 안무가 차진엽이 만난 ‘몽유도원무’ [국립극장 제공]
국립무용단과 안무가 차진엽이 만난 ‘몽유도원무’ [국립극장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무대 위로 수묵화 한 편이 그려졌다. 은은한 한지 너머로 무용수들의 몸이 겹겹이 쌓여 섬이 되고 산이 된다. 그림자가 된 몸들이 움직여 춤을 추고, 그 뒤로 아홉 가지 삶의 무게를 짊어진 나그네가 무거이 걸음을 옮긴다. 인생의 깊고 어둔 길, 굽이굽이 험준한 나의 길을 걷고 또 걸어, 첨벙첨벙 뛰어넘어 이상으로 도달한다. ‘스타 무용수’ 차진엽이 안무를 맡고 국립무용단이 풀어낸 ‘몽유도원무’다.

국립무용단은 올해 첫 신작으로 지난 21일부터 ‘더블빌’을 올리고 있다. 지금 무용계에서 가장 주목받고 인정받는 두 팀의 안무가와의 협업했다. ‘더블빌’은 차진엽이 안무한 ‘몽유도원무’와 고블린파티가 안무를 맡은 ‘신선’으로 구성된다. 술을 소재로 한 ‘신선’은 현세의 근심 걱정을 잊은 여덟 신선들의 놀음을 춤으로 풀었다. ‘몽유도원무’는 조선시대 화가 안견의 ‘몽유도원무’를 모티브로, 고단한 인생을 건너 이상 세계로 나아가는 여정을 담았다.

두 작품은 각기 다른 주제와 표현방식을 담았으나, 일관된 방향성을 갖고 나아간다.

국립무용단과 안무그룹 고블린파티가 만난 ‘신선’ [국립극장 제공]
국립무용단과 안무그룹 고블린파티가 만난 ‘신선’ [국립극장 제공]

공연의 1부를 맡은 고블린파티와 국립무용단의 만남은 재기발랄하다. 이제 ‘시작한다’는 힌트도 없이 앰비언트 사운드와 함께 조명도 꺼지지 않은 채 공연은 출발한다. 무용 공연에선 단 한 번도 본 적 없던 낯선 광경을 마주하게 된다. 무대 위엔 세 대의 스탠드 마이크가 등장한다. 무용수가 나와 독무를 이어가다 공연을 소개한다.

“이것은 맺고 어르고 푸는 이야기입니다. 오로지 춤을 추는 것에 몰두하는 모습을 잔잔한 내면이 파도를 만들어 뻗어나가는 움직임을 점차 만들어가려 합니다. 술을 한 잔 합니다. 우리는 점점 취해갑니다.”

마이크 앞에 선 무용수의 이야기는 이 무대에선 오직 ‘춤’을 보여주겠다는 선언과도 같다. 그러니 관객은 오로지 움직임에만 집중하면 된다. 그것은 현대무용을 하는 안무가들이 전통무용을 해온 무용수들과의 협업을 통해 만들어낸 움직임이다. 그것은 지금 전통춤의 모습이다. 고블린파티는 앞서 인터뷰에서 “‘전통과 현대 사이’의 새로운 것을 찾는다”는 뜻에서 “‘신선’에 ‘새로운 선’이라는 중의성을 부여했다”고 했다. ‘신선’들의 움직임은 전통의 것을 뛰어넘어 현대적이면서도, 한국춤을 오래 연마한 사람들만이 가지는 깊은 내면의 힘이 조화롭게 폭발한다.

국립무용단과 안무가 차진엽이 만난 ‘몽유도원무’ [국립극장 제공]
국립무용단과 안무가 차진엽이 만난 ‘몽유도원무’ [국립극장 제공]

‘몽유도원무’는 언어로 설명하지 않아도 무대 자체로 모든 스토리를 보여준다. 춤, 음악, 무대 디자인, 미디어아트가 일관되게 하나의 이야기를 전한다. 단 한 번도 흐트러짐 없이 끌고 가는 연출의 힘이 크다. 한 편의 무성영화이기도 하고, 한 폭의 수묵화이기도 한 ‘몽유도원무’에서도 현대무용의 몸짓들 안에 한국무용 고유의 특징들이 배어 나온다. 반복되는 앰비언트 사운드 위로 풀어내는 반복적 춤사위, 그 안에서 발산하는 에너지를 춤과 음악이 나란히 표현한다.

“지금 우리는 어디에 안주해야 하는지 ‘몽유도원’을 꿈꾼 안견의 마음에 비춰 돌아보려 했다”는 안무가 차진엽의 의도는 언어보다 친절하게 전달된다. 육중한 시름으로 색을 잃은 세상에 빛깔이 더해지는 신비로움을 눈으로 마주하면, 마음은 이미 무용수들과 도원을 거닌다. 전통과 현대 사이에 놓인 ‘지금 한국춤’의 현현이다.

국립무용단과 안무그룹 고블린파티가 만난 ‘신선’ [국립극장 제공]
국립무용단과 안무그룹 고블린파티가 만난 ‘신선’ [국립극장 제공]

‘더블빌’을 통해 확인한 것은 세 팀이 가진 각자의 존재와 이름을 증명이다. 자신의 예술세계를 구축해온 유능한 스타 안무가들과 ‘국립’의 무게를 안고 매진해온 무용단의 가치와 이유다.

이 무대는 그간 흔하게 시도해온 전통과 현대의 만남을 한 차원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세 팀은 재해석, 혹은 재창조가 무엇인지 무대로 입증한다. 이 무대에선 전통에 현대적인 것을 결합할 때 나오는 흔한 오류가 없다. 현대의 조화를 찾다 길을 잃거나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어설픈 부조화에 눈살을 찌푸리거나 헛웃음이 나올 틈을 허락하지 않는다. 각자의 자리에서 쌓아온 내공의 힘이다.

특히 전혀 다른 안무가를 만나 각각의 무대를 완성한 국립무용단의 수준은 새삼스레 감탄을 불러온다. 차진엽과 고블린파티는 “한국무용을 평생 수련한 무용수의 신체에 내재된 호흡과 춤의 선, 스타일에서 나올 수 있는 새로운 움직임과 감각”을 국립무용단의 강점이라고 했다. 현재를 살아가며 한국춤을 탐구했고, 시대의 흐름과 변화에 몸을 실으며 지금의 트렌드를 흥미롭게 담아온 젊은 단원들은 ‘국립무용단의 오늘’을 보여준 얼굴이었다. 뜨거운 땀과 열정으로 다진 시간의 길이를 입증했고, ‘지금 한국춤’의 세계적의 가능성을 증명했다.


sh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