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안 쳉 아시아 첫 개인전 ‘세계 건설’
7월까지 한남동 리움미술관 전시
칼 융부터 방탄소년단까지 영감
예술과 기술의 결합…게임ㆍAI 활용
인간 존재와 의식에 대한 탐구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화산 기슭에 자리 잡은 고대 부족은 스스로 행동하고 말하는 법을 알지 못했다. 신(申)의 목소리를 들어야만 행동하는 무리. ‘태초의 인류’에겐 의식이 없었다. 물론 가설이다. ‘의식이 없던’ 부족 소녀의 머리 위로 화산 폭발의 잔해가 떨어진다. 소녀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의식을 가진 사람이 된다. 국제 미술계에서 주목받는 작가 중 한 사람인 이안 쳉의 라이브 시뮬레이션 ‘사절’(Emissaries) 3부작이다. 라이브 시뮬레이션은 가상의 생태계 속에서 인공 지능을 가진 등장인물과 자연환경이 서로 반응하면서 사건이 일어나는 것을 보여주는 형식이다. 이안 쳉은 이 작품을 통해 “인간 의식이 진화하는 과정”을 담았다.
인류의 오랜 과제는 ‘존재의 탐구’였다. ‘나’는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나를 나답게 하는 것은 무엇인지 알기 위한 근원적 탐구는 수많은 철학가의 이론이 됐다. 미국의 젊은 작가 이안 쳉(38)도 ‘나’와 ‘나에게서 확장한 인간’을 탐구하는 데에 몰두한다.
최근 서울 한남동 리움미술관에서 만난 그는 “일본 애니메이션 ‘원령공주’로 유명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과 도시건설 게임 ‘심시티’ 개발자 윌 라이트, 심리학 대가 칼 융, ‘의식의 기원’을 쓴 심리학자 줄리언 제인스 등이 작품세계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K팝 가수인 방탄소년단(BTS) 역시 그에게 영감을 줬다.
“방탄소년단이 칼 융의 영향을 받아 ‘맵 오브 더 솔’ 앨범을 만들었다고 들었어다. 칼 융의 사상을 대중음악 앨범의 소재로 삼을 수 있다는 것에 무척 놀랐어요. 이러한 시도가 자신과 대중 스스로의 내면을 성찰하고 한 인간으로 성숙해가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이 앨범으로 인해 미국의 ‘레딧’이라는 사이트에선 칼 유의 사상에 대해 묻고 이야기하는 분위기도 만들어졌어요. 그들이 칼 융의 세계로 초대하는 역할을 했다고 생각해요.”
아시아 최초로 서울 한남동 리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작가의 개인전 ‘이안 쳉: 세계건설’은 기술과 예술의 만남을 통해 인간을 말한다. 전시엔 ‘사절’ 3부작을 비롯해 ‘밥’(BOB), ‘밥(BOB) 이후의 삶: 찰리스 연구’ 등 가상현실을 활용한 영상 작품 5점을 선보인다. 그는 첨단 기술과 상상력으로 인간 의식의 본질을 탐구하는 작업을 진행, 뉴욕현대미술관(MoMA) PS1, 런던 서펜타인갤러리 등 주요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2019년 베네치아비엔날레 본전시 등에 참가했다.
대표작인 ‘사절’은 작품 속 가상세계에서 이야기를 끌고 가는 존재다. 그가 임무에 성공하거나 실패하면 게임이 끝나고 새로 시작된다. 보통의 영상은 시작과 끝이 정해져 있고 일정한 상영시간이 있지만, 이 작품은 끝이 없다. 이야기는 매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새로운 사건이 일어난다. 그는 “‘사절’은 영원히 반복해서 스스로 플레이되는 비디오게임”이라고 했다. “누구도 이 작품을 통해 같은 결말을 만날 수 없다”. 인공지능(AI)과 게임 엔진을 통해 구축했기에 가능한 세계다.
“하나의 살아있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플레이되는 방식을 구현했어요. 아무리 단순한 생명체라도 살아있는 모든 것은 예측 불가능한 점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한 예측불가능이 복잡성을 만들고, 그 복잡성이 흥미를 가져다 준다고 생각했고요.”
그는 첨단 기술로 자신의 예술세계를 구현하나, 본질은 철학자에 가깝다. ‘인간의 의식’을 끊임없이 탐구하고, AI를 통해서도 인간의 존재 의의를 찾는다.
작가는 “어린 시절부터 인간 의식의 탐구에 대한 관심이 컸다”며 “부모님의 생각과 행동을 이해하고 싶었고, 부모님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이해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인간의 의식을 탐구하다 보니 그것은 너무나 복잡한 세계였어요. AI를 활용하지 않고서는 탐구할 수가 없었죠.” UC 버클리에서 인지과학과 미술을 전공하고, 컬럼비아대에서 비주얼아트 석사를 밟은 이력은 예술에 기술을 접목하는 데에도 도움이 됐다.
전시 작품인 뱀을 닮은 인공 생명체 ‘밥’, ‘밥 이후의 삶: 찰리스 연구’는 AI가 작품의 중심으로 나왔다. ‘밥’에선 서로 다른 욕구와 신념을 지닌 여러 개의 AI가 주도권을 잡기 위해 경쟁하면서 인간 의식의 작동 방식을 구현한다. 48분 분량의 애니메이션 ‘밥 이후의 삶: 찰리스 연구’는 작가의 주제의식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AI ‘밥’이 신경계에 이식된 소녀 찰리스가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과정을 담았다. 그 여정에 여정에 등장하는 AI는 “그것으로 인해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가고, 새롭게 정립하는 역할”이자 “나에 대해 알아가게 하는 존재”다.
그는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인생각본(Life Script)을 가지고 있다고 한 심리학자 에릭 번의 ‘인생각본’ 이론에 흥미를 느꼈다”며 “중요한 것은 각본이 정해져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내 인생의 각본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자각하고 성찰하는 것이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전 부모님께 지나친 독립성을 부여 받았어요. 좋은 점은 모든 일에 동기부여가 되고, 스스로 해낸다는 거예요. 하지만 지나치게 집착하게 되고, 모든 걸 혼자 해내야 한다는 단점도 있어요. 저마다 자신의 각본을 들여다보고, 계속 가져갈 것과 버릴 것을 스스로 판단하고 삶을 이끌어나갈 때 비로소 성숙해지고, 삶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 역시 자신의 인생각본을 다시 썼다. 이안 쳉은 매 작품마다 사람, 존재의 성장 과정을 살핀다. 그 안엔 ‘돌봄’의 정서가 관통한다. “가장 인간적인 정서인 ‘돌봄’을 차갑고 기계적인 애니메이션으로 풀어낸다는 것”(태현선 리움미술관 학예연구실장)이 작가의 특별한 점이기도 하다.
애니메이션은 인터랙티브 기능인 ‘월드워칭 모드’를 통해 작품에 숨은 정보와 작가의 세계관을 만날 수 있다. “동화책을 읽어 줄 때마다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말한 두 살 짜리 딸에게 영감을 얻은 아이디어다.
형식은 파격적이고, 이야기는 심오하다. 구체적인 설명 없이는 예리한 상상력을 따라가지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안 쳉은 그러나 “첫 아시아쇼를 한국에서 하는 것이 매우 자랑스럽다”며 “미술과 기술에 대해 한국 관객들의 이해가 높을 거라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작가로서 사람들의 무의식에 끊임없이 말을 걸고 싶어요. 기술을 통해 그것을 할 수 있다면 너무나 흥분되는 일이에요. 새로운 기술을 통해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공통적인 이슈나 삶의 도전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면 굉장히 의미 있는 일이 되리라 봐요. 미술, 기술 뿐만 아니라 정신성까지 어우러진 이 작품들을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은 한국인뿐이라고 생각해요.”
shee@heraldcorp.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