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로 미뤄져 1년 3개월 만에 한국 초연

후기 푸치니 작품 ‘서부의 아가씨’

난해하지만 아름다운 선율…음악이 만든 드라마

[국립오페라단 제공]
[국립오페라단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19세기 중반의 ‘황금 시대’. 오케스트라가 장엄한 시작을 알리면 관객들의 시선은 금을 찾아 캘리포니아로 모여 든 이방인으로 북적북적한 술집 폴카로 향한다. 폴카에선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유일한 여흥 거리로 시작한 카드놀이에서 속임수를 쓴 광부가 집중 공격을 당하고, 광부들의 ‘정신적 지주’인 미나를 향한 구애와 착각 속의 짝사랑 스토리가 이어진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광부들의 애끓는 드라마도 빠지지 않는다.

국립오페라단의 ‘서부의 아가씨’는 지난 1일부터 4일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에서 공연, 한국 관객들과 처음 만났다.

‘라 보엠’, ‘토스카’, ‘투란도트’ 등 수많은 히트작을 낸 작곡가 푸치니의 오페라 중에서도 ‘서부의 아가씨’는 ‘실험작’으로 꼽힌다. 대규모 오케스트라 편성이면서도 섬세한 기교와 풍부한 호소력이 이어져야 하고, 성악가들은 오케스트라의 커다란 음량을 꿇고 드라마를 전달해야 한다. 게다가 푸치니는 당시 미국식 대중음악으로 알려진 흑인음악에서 유래한 재즈와 블루스가 아닌 서부음악의 어법으로 꼽히는 전통음악, 통속민요를 차용했다. 후기 낭만주의, 특히나 현대음악에 가까운 박자의 변주가 많은 만큼, 성악가 한 사람 한 사람의 역량이 중요하다. 이들 중 누구 하나라도 실수를 하면 음악은 엉망이 돼버리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성악가나 지휘자도 꺼리는 작품이 바로 ‘서부의 아가씨’다.

한국 초연 무대는 완성도가 높았다. 음악은 ‘한 편의 드라마’였다. 이탈리아 지휘자 피에트로 리초와 4관 편성의 대규모 오케스트라(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는 섬세하면서 짙은 감성의 호소력을 보여줬고, 물 흐르듯 이어지는 드라마는 관객들의 몰입을 높였다.

[국립오페라단 제공]
[국립오페라단 제공]

모든 상황은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설명을 대신했다. 왁자지껄한 폴카의 상황, 등장인물들의 소개, 폴카의 여주인 미나와 보안관 잭 랜스, 도망자 딕 존슨의 긴박한 삼각관계와 미니와 존슨이 사랑을 확인하는 그 모든 순간들이 음악으로 표현돼 극을 이끌었다. 오케스트라는 낭만적이고 서정적이라 귀에 착 감기는 선율을 능수능란하게 선보이는가 하면, 선율과는 동떨어진 화음과 화성이 이어지는 어려운 악보를 흔들림 없이 표현했다. 특히 2부에서 미니와 딕 존슨의 카드놀이 당시 여주인공 미니의 심리 상태를 고스란히 반영한 음악은 무대의 긴장감을 생생히 전달했다.

음악이 만들어내는 한 편의 영화 안에서 성악가들은 드라마틱한 성량으로 극장을 꽉 채웠다. 더블 캐스팅으로 무대에 오른 ‘서부의 아가씨’는 ‘투란도트’의 칼라프 왕자, ‘오텔로’의 타이틀 롤, ‘서부의 아가씨’의 딕 존슨 등의 역할을 맡은 세계적인 테너 마르코 베르티, ‘푸치니 가수’로 불리는 카린 바바잔얀, 카리스마 넘치는 음색과 표현력의 양준모가 각각 딕 존슨, 미니, 잭 랜스를 맡았다. ‘서부의 아가씨’에선 손 꼽히는 아리아는 없지만, 등장인물 한 사람 한 사람의 캐릭터를 반영한 음악들이 인상적이다. 거칠고 자존심 강한 보안관 잭 랜스의 성격을 고스란히 반영한 음악, 달콤한 세레나데를 들려주는 듯한 딕 존슨의 노래, 강인하면서도 섬세하고, 진정한 사랑을 기다리는 미니의 노래가 적재적소에서 빛을 발했다. 다만 푸치니의 실험과 난해함이 성악가들의 음악에도 고스란히 담겨 오페라 초보자들이 편히 감상할 수 있는 작품은 아니었다.

[국립오페라단 제공]
[국립오페라단 제공]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담아낸 무대도 인상적이다. 총 3부로 진행되는 ‘서부의 아가씨’의 무대는 세 개의 공간에서 이뤄진다. 1부에선 1910년대 캘리포니아 탄광에 자리잡은 술집 ‘폴카’, 2부에선 미니와 딕 존슨의 사랑을 확인하는 아늑한 오두막, 3부는 도적으로 밝혀진 딕 존슨을 추적하고, 그의 죄값을 치르게 하려는 광부들의 혈전이 벌어지는 광야다. 흥미롭게도 ‘서부의 아가씨’는 특정 장소로 한정된 1, 2부에서조차 바깥 풍경을 군데 군데 묘사했다. 폴카의 커다란 벽 사이로 보인 설산, 아늑한 오두막과 대비되는 눈 내리는 숲속 풍경, 귓전을 울리는 눈바람 소리까지 무대로 옮겼다. 야외를 배경으로 한 3부에선 황량하면서도 안개 낀 한겨울의 탄광촌을 실감나게 보여줬다.

애초 지난해 4월 개막 예정이었던 ‘서부의 아가씨’는 코로나19로 1년 3개월이나 개막 일정이 미뤄졌다. 마침내 만난 한국 초연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관객들은 압도적인 무대 연출과 어렵지만 아름다운 음악, 오랜 준비 기간을 통해 완성도 높은 무대를 선보인 세 명의 주인공과 광부 역할을 맡은 10여명의 성악가, 50명의 메트오페라합창단을 향해 아낌 없는 박수를 보냈다.


sh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