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에서 화폐(money)는 ‘전문화된 지급 수단으로서 그 나라 경제 주체들이 일반적으로 수용하는 재화’로 정의된다.
상품 구매자가 판매자에게 어떤 재화를 양도했을 때 판매자가 구매자에게 더는 상품 대가에 대한 청구권을 행사할 수 없다면 그런 재화가 지급 수단이다. 그런데 지급 수단이라고 무조건 화폐인 건 아니다. 사과와 배 사이에서 물물교환이 이뤄지는 경우, 사과와 배는 각각 지급 수단으로 기능하지만 그중 어느 것도 화폐가 아니다. 화폐는 단순한 지급 수단이 아니라 신뢰성·편리성 등 통용되기에 적합한 여러 가지 특성을 지닌 전문화된 지급 수단이면서 또한 그 나라 경제 주체들이 일반적으로 수용하는, 그런 재화다.
화폐로는 크게 물리적 실체가 있는 현금(cash)과 예금 중에서 일정한 조건을 갖춘 것, 두 종류가 있다.
기존 경제학자들은 예금을 엄밀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차제에 간략하지만 정확하게 설명하기로 하겠다. 예금은 장부상으로만 존재하는 가공(架空)의 재화인데, 비유컨대 예금계좌(account)라는 그릇에 담겨 있는 1원짜리 무형의 ‘공(ball)’ 하나하나가 낱개의 예금으로서 영어로는 ‘a deposit’이다. 2원어치 이상의 예금은 ‘deposits’다. 이런 예금 중에서 요구불예금이면 다 화폐라고 기존 경제학자 대부분은 잘못 이해하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수표제도나 온라인이체제도에 연계돼 그 자체가 직접 양도될 수 있는 이전가능요구불예금만이 화폐다. 예금은행들이 지준예치금 명목으로 보유하는 중앙은행당좌예금도 그 ‘공(ball)’ 자체가 일반적인 이전가능요구불예금과 본질적으로 같기 때문에 화폐에 해당한다.
비트코인과 같은 디지털토큰(digital token)은 일부 경제 주체 사이에서 지급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래서 ‘장차 화폐로 격상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런데 화폐는 ‘일반적 수용성을 지닌 전문화된 지급 수단’이다. 반면 현재 수준의 디지털토큰은 특히 다음과 같은 점에서 즉, 그 가치가 일상적으로 등락하고 또한 여차하면 폐품의 수준으로 하락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신뢰성을 결한 재화다. 신뢰성을 결한 재화는 전문화된 지급 수단이 되기가 어렵고, 일반적 수용성을 가지기는 더더욱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수준의 디지털토큰이 화폐로 격상될 가능성은 난세(亂世)에서가 아닌 한 전무(全無)하다고 할 수 있다.
만일 어떤 거대 기업이 디지털토큰을 발행하고, 그 소지자가 요청하면 언제든 그것을 고정률로 법정 화폐와 ‘태환(兌換)’해주겠다고 약속한다면 그런 ‘태환형 토큰’은 어떻게 될까? 거대 기업이라도 자본력과 공신력 양면에서 중앙은행에는 크게 못 미칠 것이기 때문에 그 토큰도 ‘비트코인에 비해 한층 업그레이드된 유사 화폐’ 이상으로 승격되지는 못할 것이다.
이에 반해 중앙은행이 직접 발행하는 중앙은행디지털현금(central bank digital cash)은 곧바로 화폐 역할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그 이름과는 달리 현금은 아니다. 물리적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블록체인’이라든가 ‘분산원장(分散元帳)’ 같은 첨단 용어들에 의해 설명되는 이것은 화폐의 범위를 다시 규정해야 할 새로운 종류의 화폐일까? 아니다. 이것은 그 실질에 있어 중앙은행당좌예금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물론 일반대중이 접근할 수 없고 기명식인 종래의 중앙은행당좌예금과는 다르다. 중앙은행디지털현금-이것은 ‘일반대중에게도 문호가 개방되고 무기명식인 새로운 중앙은행당좌예금’이다.
참고로 향후 비트코인의 시장 가치는 어떻게 될까? 블록체인도 해킹당하는 문제 등이 안 생긴다면 디지털토큰의 원조라는 상징성과 어느 정도의 희소성 덕분에 최소한 골동품으로서의 가치는 누릴 수 있을 것 같다.
배선영 연세대 경제대학원 겸임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