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때 아닌 퀸과 프레디 머큐리 열풍을 만들었던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큰 성공에는 젊은 세대들의 적극적인 호응이 있었다. 놀랍게도 이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활동했던 퀸과 프레디 머큐리의 이야기를 담은 이 영화를 보고 젊은 세대들은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들은 SNS를 통해 자신들의 이 ‘색다른 경험’을 이야기했고, 이것은 입소문이 되어 영화를 신드롬으로 만들었다.
과거를 다시 현재로 소환해낸 것이기에 ‘복고’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이 현상에서 새로운 점은 이 신드롬이 젊은 세대들을 중심으로 벌어졌다는 점이다. 그 때를 경험해보지 않은 세대들이니 추억이나 향수라고 말할 수 없는 무엇이 거기에는 존재했다. 그것은 바로 ‘아날로그의 새로움’이었다. ‘아날로그’라고 하면 어딘지 오래된 느낌을 주니 여기에 ‘새로움’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게 어딘지 이율배반적으로 여겨지지만, 디지털 세대의 관점으로 보면 이는 쉽게 이해된다. 즉 아날로그적 음악 경험을 들려주는 퀸을 경험해보지 않은 디지털 세대는 이 과거가 오히려 새롭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최근 들어 젊은 세대들에게 확산되고 있는 이른바 ‘뉴트로(New+Retro)’는 향수나 추억으로서의 복고와는 다른 지점이 있다. 디지털 시대가 가져온 반작용의 의미가 더 크다.
모든 게 똑같이 무한복제되어 널리 퍼져나가는 디지털 시대가 젊은 세대들에게 주는 불안감과 몰개성화는 ‘뉴트로’가 생겨나는 가장 큰 이유다. 언제 어디서든 접속해 음원을 공유할 수 있는 시대지만, 그래서 빠르게 소비되고 빠르게 사라지는 것들을 개성 없이 받아들이며 살아간다는 건 불안할 수밖에 없다. 그건 마치 나라는 존재가 빠른 속도로 사라져가는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전설로 남아 지금의 젊은 세대들의 마음까지 울리는 음악을 들려주는 퀸에 매료되는 것이다. 그 자체가 사라지지 않는 것들이 존재한다는 방증이니 말이다.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건 레코드판 같은 ‘일회적 경험’이 주는 즐거움이다. 레코드판은 다소 튀고 균질한 음을 들려주지 못하지만, 만 번을 틀어도 똑같이 음을 내는 디지털 음원은 도저히 주지 못하는 그런 단 한 번의 개인적 경험을 가능하게 해준다.
그래서 젊은 세대들은 언제 어디서든 스마트폰을 들면 척척 찍어내는 디지털 카메라 대신 부모가 장롱 속에 고이 모셔둔 필름 카메라를 고쳐 들고 거리로 나선다. 자로 잰 듯 넓혀지고 반득해진 도로 대신 언제 어디로 꺾어질지 알 수 없고 거기서 누군가를 조우할지 알 수 없는 골목 문화 속으로 들어간다. 커피 한 잔을 마셔도 정량화된 프렌차이즈를 찾기보다 다소 시간이 걸리고 돈이 들더라도 커피콩을 구입해 손수 갈아 핸드드립한 커피를 마시는 경험을 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뉴트로를 보면 ‘기술복제 시대’가 상실시킨 아우라 경험에 대한 새로운 욕망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디지털 시대를 경험하며 삶 또한 복제되듯 살아가는 건 아닌가 하는데 대한 반작용. 그래서 나만의 일회적 경험을 통한 순간적인 아우라를 느낄 때 얻게 되는 삶에 대한 활력 같은 게 거기서는 느껴진다. 디지털은 그렇게 우리에게 편리함을 줬지만, 그만한 불편함과 불안감을 주었다. 우리가 애써 아날로그의 불편함을 감수하려 할 정도로.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