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 프로젝트 그룹 육지거북(33ㆍ본명 정진영)의 데뷔 앨범은 그의 이름처럼 느리게 태어났다. 어느 시절엔 ‘헤비메탈’만이 진짜 음악이라며 ‘록 스피릿’에 빠져들었고, 잠들지 않는 열망과 일시불로 찾아온 삶의 굴곡을 만나며 쓰린 눈물도 삼켰다. 그럴 때 그의 귓가엔 조용필의 ‘꿈’이 흘렀다. 10년 넘게 묵혀뒀던 음악들은 돌고 돌아 한 장의 앨범에 담겼다. 음악을 향한 갈망을 품은 이후 18년 만이라고 한다. 아주 느리게, 그리고 꾸준히도 걸었다.

지난 19일 저녁, 매일 보던 회사 후배와 조금은 다른 모습으로 마주 앉았다. 월드컵 시작 전, “선배, 나 앨범 나오잖아요. 마무리 작업 중이에요.”, “요즘 앨범내기 참 쉬워. 월드컵 대항마야?” 툭 던지고 말았는데, 몇 주 뒤 후배는 소박하게 꾸민 앨범 한 장을 내밀었다.

‘메탈키드’를 자처하던 이 친구는, 출근시간이던 6시 무렵만 되면 앞자리에서 은은한 술내음을 풍겼다. 후배의 데뷔 미니앨범(‘오래된 소품’)엔 ‘노안미모’를 자랑하는 충청도 남자의 겉모습에선 찾아볼 수 없던 ‘소녀감성’의 연주곡들이 조심스레 자리하고 있었다. 편안한 피아노 선율엔 아련한 그리움(‘꼬마를 기다리며’)이 묻어나고, 단조롭지만 재치있는 변조(‘비 오던 날 도착한 편지)에선 ‘웹툰덕후’의 ‘변태감성’이 몰래 고개를 내밀었다. ‘은하철도 999’의 주제곡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에 손을 댄 ‘창백한 푸른 점’은 EBS 시사교양 프로그램 ‘문학사랑e’(2009)의 시낭송 배경음악으로 쓰였다. ‘찰나의 순간’ 조차 볼 수 없는 별똥별의 슬픈 운명은 이름 모를 누군가의 마지막 순간을 닮아 ‘눈물(유성우)’이라는 곡으로 태어났다. 피아노 소리를 눈물소리처럼 그린 이 곡은 단편영화 ‘도화지’(2010)의 영화음악으로 삽입됐다. 사계절을 컨셉트로 담긴 4곡에 더해진 보너스 트랙은 앨범 가격에선 특별히 제외됐다. 고3 시절 수능을 앞두고 무려 석 달간 공을 들였던 ‘코리안 펑크’다. ‘뮤지션(오래된 소품)이고픈 소설가, 소설가(도화촌기행)이고픈 기자(헤럴드경제)’라는 정진영의 이름 옆에 오랜된 꿈 하나가 현실로 새겨졌다.

“고등학교 때 음악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곡에 가사를 쓰면서 글을 쓰게 됐고, 글을 쓰다 보니 기자가 됐죠. 기자가 돼서 앨범을 낼 수 있었어요. 이상하고 신기한 운명이에요. 한 달 반 전엔 생각도 못했던 일이지만요.”

‘정진영 앨범발매추진위원회’가 있었나 싶을 만큼 빠른 시간 안에 이뤄진 일이었다. 덕분에 그는 두 개의 ‘최초’라는 수식어를 안았다. 인디신 최초의 ‘뉴에이지 앨범’, ‘대중음악’ 기자 최초의 음악앨범이다.

취재를 위해 만나던 뮤지션들에게 자신의 음악을 들려줄 때마다 “이 곡 좋다”, “탐난다”는 칭찬을 들었나보다. “정말 그런가” 착각이 들 정도의 감개무량한 반응에 음악계에서 돈을 만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고 했다. 친한 레이블 대표를 찾아가 음악을 들려주니 “약간 허접한 게 있어. 근데 이 바닥엔 너보다 허접한 게 훨씬 많다”는 답을 들었다. 내심 안심도 됐다. “그럼 형, 중간 이상은 간다는 거에요?”, “중간은 넘지.”

일사천리로 앨범 작업이 시작됐다. 오래 품고 있던 곡들을 직접 믹싱하고, 재킷 사진 촬영까지 모두 해냈다. 철저하게 ‘인디스럽게’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장르의 구분이 아니에요. 자본의 도움 없이 자기 음악을 하는게 인디의 의미라고 생각해요. 처음부터 그걸 지키고 싶었어요. 앨범 디자인도 대단하진 않지만, 내 나름의 느낌을 담고 싶었죠. 하나 못한 게 마스터링이에요.” 육지거북의 첫 앨범 마스터링은 친한 동생이 된 ‘재주많은 뮤지션’ 레인보우99가 맡아줬다. 방어대창 한 접시에 ‘저예산으로 고퀄리티를 뽑아낸’ 일등공신이라고 한다.

‘정진영 기자’의 뉴에이지 앨범이라니 친한 뮤지션들은 적잖이 놀라기도 했다. ‘메탈키드’라더니, 적어도 ‘모던록’은 나올 줄 알았는데, 그동안 들려준 음악과는 전혀 다르다며 의아해했다. 그럴 때마다 “형, 내가 록으로 형을 이길 수 있겠어요?”, “내가 모던록으로 널 어떻게 이기냐?”고 말했다.

“평생 하고 싶었던 게 음악이었어요. 그 시간동안 수많은 음악을 듣다 보니 당연히 알잖아요. 이 바닥엔 음악 잘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아요. 명함을 내밀 수 없어요. 어떻게 그 사람들을 상대할 수 있겠어요. 뉴에이지 앨범은 틈새시장 공략이었죠.” 또 ‘허허’ 웃는다. 그러다가도 “음악만 들려주고 싶은 마음이 이었다”며 “음악만으로 너희들 곁에 있는 나도 욕 먹지 않는 음악을 하고 있다고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다. “‘오래된 소품’ 수록곡을 만들던 20대 초반엔 누가 알아주진 않았지만, 진짜 음악은 뭘까 고민이 깊었다”는 그는 “음악 자체가 사람들에게 울림을 줄 수 있다면 복잡한 편곡도 뛰어난 보컬도 필요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고 한다. 연주곡 앨범이 태어난 계기였다.

고맙게도 그 진심을 알아치린 뮤지션들은 정성스레 앨범평을 적어 보내줬다. 홍보자료를 빼곡히 메운 뮤지션들의 이름만 보면 슈퍼스타의 앨범 버금간다. 선우정아, 에피톤 프로젝트, 알레그로, 안녕하신가영, 고래야, 프롬, 성시권 대중음악평론가까지, 한결같이 호평이다. 육지거북의 데뷔앨범을 마스터링해준 레인보우99는 “인디 뮤지션들의 좋은 친구였던 그가 인디신에 뛰어들어 동료가 된 것을 진심으로 환영한다”고 적었다.

“너무나 고마운 사람이 많아요. 혼자 되는 건 아무 것도 없어요. 음악하는 친구들도 얼마나 당황했을까요. 술 취한 형이 와서 자기 음악 들어보라고 하고…. 진지하게 듣고, 진지한 이야기를 적어둔 뮤지션들에게 정말 고마워요. 관계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느꼈어요.”

육지거북의 데뷔 앨범엔 아직 가사는 없다. 이제 처음 디뎌본 진짜 뮤지션의 세계에서 그의 다음 앨범엔 차마 꺼내지 못했던 ‘오래된 소품’을 또 한 번 내보이며 이런 가사가 담길 지도 모른다. “화려한 도시를 그리며 찾아왔네. 그 곳은 춥고도 험한 곳. 여기저기 헤매다 초라한 문턱에서 뜨거운 눈물을 먹는다…. 저기 저 별은 나의 마음 알까. 나의 꿈을 알까. 괴로울 땐 슬픈 노래를 부른다. 이세상 어디가 숲인지 어디가 늪인지. 그 누구도 말을 않네.”(조용필 ‘꿈’ 中) 그리고 육지거북이 펼쳐놓은 인생의 책 한 권에 그 스스로 답을 찾지 않았을까.

고승희 기자/shee@heradl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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