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강승연 기자] 프랑스어로 ‘프레르 엥미’(freres ennemis)란 말이 있다. 사상을 공유하는 듯하면서도 첨예하게 대립하는, ‘동지’이자 ‘적’인 관계를 가리키는 말이다. 세계적 석학 이매뉴얼 월러스틴 예일대 석좌교수가 지난 1997년 쓴 논문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에서 언급한 개념이다.

이라크에서 발생한 과격 수니파 무장단체 ‘이라크ㆍ시리아 이슬람국가’(ISIS)의 봉기로 중동 정세가 혼란에 빠지면서 ‘프레르 엥미’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중동의 패권을 놓고 오랫동안 대립해온 수니파 맹주 사우디아라비아와 시아파의 이란이 ISIS의 세력 확대를 막기 위해 손을 잡는 것 아니냐는 관측에 힘이 실리면서다.

▶“ISIS 막자”…사우디-이란 공감대?=월러스틴 교수는 알자지라 기고문을 통해 “사우디와 이란 간 관계가 과거의 적이 오늘날 동지가 되는 ‘프레르 엥미’처럼 급격히 가까워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실제 최근 몇 달 간 양국 간 비공개 회담이 수차례 진행됐다는 점은 이 같은 가능성에 무게를 실어주고 있다.

이는 중동 맹주를 자처하는 양국 모두 ISIS의 영향력이 역내 정세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것을 우려하는 등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이라크는 동쪽으론 이란, 남쪽으론 사우디와 맞닿아있다. 북부 시리아와의 국경지역에서 이미 충돌이 발생한 만큼 불길이 번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또 ISIS는 이라크를 벗어난 ‘초국경 지대’(trans-border zone)에 이슬람 성전주의자의 국가 ‘지하디스탄’을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어 이라크 정부군과의 ‘내전’만으로 바라보기엔 무리가 있다.

ISIS 대응이 국론 통합의 기회라는 점도 양국 간 협력을 점치게 하는 요인이다.

최근 사우디와 이란에선 도시 중산층이 성장하면서 자유화를 요구하는 신진 세력과 전통 이슬람을 수호하려는 보수 세력 간 마찰이 발생, 정권을 불안케 했다. 하지만 ISIS라는 외부의 적이 주는 위협이 강해짐에 따라 성난 민심의 표적을 밖으로 돌릴 수 있게 됐다.

월러스틴 교수는 “이란뿐 아니라 미국 최우방이었던 사우디조차 최근 서방이 중동 정세에 개입하는 것에 불만을 느끼고 있다”면서 “역내 국가끼리 해결책을 마련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또 양측이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 ▷이집트 군정에 대한 불안 ▷아프가니스탄 분쟁 해결 등에 동감하고 있다는 사실도 이같은 전망에 무게를 싣는다.

▶GCC 對 이라크ㆍ시리아=ISIS로 촉발된 이라크 내전은 중동 내부의 종파 갈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중동 다수를 차지하는 수니파 국가들과 시리아, 이라크로 대표되는 시아파 국가들 간 갈등이다.

그 누구보다 이번 일로 이라크의 누리 알말리키 정권이 흔들리기를 바라는 것은 사우디 왕실이다. 압둘라 빈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 국왕은 그동안 알말리키 총리를 이란의 꼭두각시로 간주하고 선을 그어왔다. 지난 4월엔 사우디 북부 이라크와의 국경지대에서 대규모 군사훈련을 실시, 이라크 정권에 군사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사이먼 헨더슨 워싱턴근동정책연구소 연구원은 지난 13일 포린폴리시(FP) 기고문을 통해 “압둘라 국왕은 이라크에 대사를 파견하는 것을 거부하고 걸프협력회의(GCC) 회원국들에도 이라크에 고립적 태도를 취할 것을 촉구했다”고 지적했다.

화학무기를 동원해 수니파를 탄압한 시리아의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 역시 GCC로 대표되는 수니파 국가들엔 ‘눈엣가시’다.

때문에 이들 국가들은 지금까지 시리아, 이라크에서 반정부 활동을 벌이고 있는 ISIS 같은 극단적 이슬람 단체들에 ‘자금줄’ 역할을 해왔다고 보여진다. 알말리키 총리도 최근 사우디와 카타르, 쿠웨이트 등 GCC가 ISIS에 자금을 지원했다고 공세를 펼쳤다.

이와 관련 지난해 12월 발간된 브루킹스연구소의 보고서는 “지난 2년 반 동안 쿠웨이트가 시리아 내 수많은 반군 세력을 지원하는 이들을 위한 금융 허브로 떠올랐다”면서 쿠웨이트를 통해 시리아 반정부단체들로 흘러간 돈이 수억달러에 달한다고 추산한 바 있다.

▶사우디의 ‘ISIS 딜레마’=ISIS의 존재는 사우디엔 ‘양날의 검’이다.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대리전’을 펼치는 한편, 사우디를 향해서도 날을 세우고 있어 훗날 위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16일 블룸버그 통신에 따르면 지난달 사우디 수도 리야드의 거주지역 2곳에서 ISIS의 소행으로 추정되는 단원 모집 전단지들이 발견됐다. 이 전단지는 ‘가짜 턱수염’을 기른 무슬림을 향한 경고가 주내용이다. 가짜 턱수염은 무슬림인 척하지만 실상은 적인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보통 ISIS 등 지하디스트 단체들이 미국의 맹방인 사우디를 비판할 때 사용되는 표현이다.

서남부 타이프 시에선 정부청사 건물에 과격단체의 구호를 그래피티로 그리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촬영돼 유튜브를 통해 공개되기도 했다.

두바이 소재 근동 및 걸프 군사분석 연구소의 시어도어 카라식 소장은 블룸버그에 “ISIS가 사우디에 대한 전략적 움직임을 확대하고 있는 것”이라면서 “그들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간단한 정보 작전을 펼치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 아랍권 위성방송 알아라비야에 따르면 사우디 내무부는 지난달 국내에서 국내외 요인들을 상대로 테러공격을 모의한 혐의로 무장단체 소속원 62명을 체포하고 44명을 뒤쫓고 있다. 이들은 ISIS와 예멘의 알카에다 연계단체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ISIS가 사우디 내부에서도 테러 활동을 벌이고 있다는 뜻이다.

아울러 ISIS와 시리아 정권 간 관계도 미묘하다. 아사드 대통령은 서방의 지원을 받는 반군 세력 자유시리아군(FSA)을 제거하기 위해 ISIS와 협력하고 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고 미국 인터넷매체 데일리비스트는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