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포그래퍼 유지원 글문화연구소장
문자는 지역·시대 담은 ‘진화하는 생물’
韓 디자이너는 ‘한글 주체성’ 지켜야
AI시대 ‘행동·결정·책임’ 인간의 영역
“나 지금 궁서체다.” 진지할 땐 궁서체, 격식 차릴 땐 명조체, 분노할 땐 고딕체. 서체는 밋밋한 글자에 생생한 감정을 불어넣는다. 굴림체로 출력된 연예인의 자필 사과문이나 아기자기한 손글씨 폰트의 사직서를 마주하면 극심한 ‘인지 부조화’를 겪게 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글자의 생김새가 말의 무게를 ‘배반’하면 엇박자가 난다. 모바일 메신저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대화가 이동한 시대, 활자는 ‘표기 기호’를 넘어 사람의 억양과 표정, 감정의 온도까지 전달한다.
“메디컬 드라마는 같은 제목이라도 부드러운 폰트를 쓰면 휴먼드라마로 인식되고, 날카로운 폰트를 쓰면 긴장감 있는 의료 현장이라는 메시지를 줘요. 같은 말도 말투가 다르면 다른 뉘앙스를 전해 기분이 달라지듯이, 같은 내용도 어떤 폰트를 쓰느냐에 따라 다른 인상을 주게 되죠.”
다음 달 2일 ‘비욘드 비주얼’을 주제로 열리는 헤럴드디자인라운지 패널 토크에 참여하는 유지원 글문화연구소장은 “폰트는 눈을 위한 말투이자 비언어적 메시지”라고 헤럴드경제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말했다. 서울대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하고 독일 라이프치히 서적예술대학에서 타이포그래피를 공부한 유 소장은 민음사 북디자이너와 산돌 수석연구원을 거쳐 현재 글문화연구소를 이끌고 있다.
음성언어와 문자언어의 세계에서 타이포그래피는 ‘모양’을 다루는 영역이다. 유 소장에게 글자는 ‘눈으로 듣는 음악’과 같다. 그는 “음악은 악기의 음색들이 음의 배열을 이루듯 타이포그래피 역시 한글 기본 자모 24자가 결합해 세상의 모든 언어적이고 비언어적인 의미를 직조해 낸다”고 설명한다. 유 소장은 글자를 ‘진화하는 생물’로 본다. 글자의 모양은 “지역성과 시대성을 반영”해 왔다는 것이다. 고령화와 개인화가 가속화되는 오늘날, 타이포그래피는 심미적 영역을 넘어 신체 약자의 삶을 지탱하는 사회적 책무로 외연을 확장한다. ‘다품종 소량생산’이 가능해진 디지털 환경에서 그는 노안이나 녹내장 등을 겪는 고령자와 저시력자를 위한 폰트 개발에 매진하고 있다.
그는 “안과 의학과 인지과학을 접목해 특정 연령이 가진 눈의 기능을 연구할 때 폰트는 심미성을 넘어 시력의 영역으로 들어온다”며 “기능성만 중시하면 인간을 너무 기계적으로 바라보게 되는데 고령자의 정서도 기능 못지않게 존중받아야 한다. 시각 연구를 거치며 글자가 지켜내야 하는 인간의 존엄을 깊이 생각하게 된다”고 했다.
세계 문자가 만나는 다국어 타이포그래피 환경에서 ‘한글의 주체성’을 지키는 일 역시 책임의 연장선에 있다. 유 소장은 “한글은 한국어와 한국의 환경, 한국인의 신체 특성이 오랜 시간 정교하게 맞물려 진화해 온 거대하고 미묘한 생태적 네트워크”라며 “서구 중심의 잣대로는 온전히 환원될 수 없기에, 한글 디자인의 형태적·문화적 최종 판단 주도권은 반드시 모국어로 한글을 체화한 네이티브 디자이너가 쥐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AI(인공지능)가 방대한 데이터로 새로운 글꼴을 만들어내는 시대, 인간 창작자가 설 자리는 과연 어디일까. 유 소장은“AI는 개인의 편향을 강화하는 위험이 있는데 인간은 인간끼리의 마찰을 견디는 능력을 잃어서는 안 돼요. 개인과 거대한 시스템 사이 아찔한 간극 속에서, 내 눈에 파악되는 휴먼스케일의 공동체를 회복해야 하죠. 무엇보다 행동과 결정에 대한 책임을 지는 일, 그것이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이에요.”
고승희 기자
shee@heraldcorp.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