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영·이정은 주연 ‘아버지의 집밥’

“떠밀리듯 시작”…베테랑 감독의 응전

“세대를 서로를 잇는 시냅스가 되길”

‘아버지의 집밥’ 이준익 감독 [레진스낵 제공]
‘아버지의 집밥’ 이준익 감독 [레진스낵 제공]

[헤럴드경제=손미정 기자] “인생은 다 떠밀려서 사는 거잖아요.”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어느 순간 할 수 있는 일을 한다는 것이 꿈 같은 목표가 됐다. 투자가 마르면서 이름난 감독들조차 극장 영화를 포기하는 일이 생겨났다. 수십 년의 세월을 쏟아붓고도 여전히 작품 하나를 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들도 늘어났다. 그러던 중, 경력 30년이 훌쩍 넘는 베테랑 감독은 숏폼 시장에서 새 기회를 봤고, 후배 감독들에게 도전을 권했다.

“그런데 왜 감독님은 안 해요? 계급사회예요?”

되돌아온 후배들의 농담 섞인 답이 그의 뼈를 때렸다. 그렇게 자신이 뱉은 말이 씨가 돼 떠밀리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다. ‘왕의 남자’(2005), ‘동주’(2016), ‘자산어보’(2021) 등 시대극의 장인으로 오랜 시간 대중과 부대껴온 ‘천만 감독’ 이준익이 숏드라마로 돌아온 계기는 막상 그리 거창하지 않았다.

이달 말 이준익 감독이 연출한 레진스낵 오리지널 숏드라마 ‘아버지의 집밥’이 공개된다. 고리타 작가의 동명 웹툰을 이 감독과 2000년대 초 ‘달마야 놀자’ 연출부에서 함께 일했던 신동선 작가가 각색했고, 이 감독이 그것을 자신도 처음 겪어보는 ‘세로형’ 도화지에 옮겼다. 정진영, 이정은, 변요한 등 캐스팅까지도 신뢰 그 자체인 이 숏드라마는 지난 9일부터 2시간 26분짜리 ‘세로형 시네마’로 극장에서 먼저 관객을 만나고 있다.

오랜만에 대중 앞에 선 이준익 감독을 지난 9일 서울 성동구 키다리스튜디오 사옥에서 만났다.

‘아버지의 집밥’ [레진스낵 제공]
‘아버지의 집밥’ [레진스낵 제공]

“숏폼 찍어놓고 극장 와서 장사하려 한다는 반감이 있을 수도 있겠죠. 이미 자리 잡은 감독이 요즘 세대의 영역까지 넘본다는 생각도 있을 거예요.”

베테랑 기성 감독의 숏드라마 도전, 극장 개봉이라는 이례적 시도를 바라보는 시선을 감독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 감독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된 숏폼의 저변을 넓히는 일이 자신의 역할이라는 마음으로 이 작품의 연출을 승낙했다.

자극적이기만 하다고 손가락질받는 숏폼이라는 장르에 지극히 뻔하고 밍밍한 이야기를 꺼내 든 이유는 따로 있다. 평생 부엌과는 거리를 두고 살아온 아버지 ‘하응’(정진영 분)이 뒤늦게 가족을 위해 밥을 짓기 시작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 감독은 “다들 뻔한 게 나쁘다고 하지만, 뻔한 것만큼 소중한 게 없다”며 웃었다.

“부부, 부모·자식 관계는 지난 수천 년간 본질이 바뀐 적 없는 가장 뻔하고도 소중한 이야기잖아요. 요즘 영화든, 숏폼이든 다들 자극을 지향하는데, 저는 오히려 자극이 거의 없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당연한 것만큼 소중한 게 어디 있겠어요.”

‘아버지의 집밥’ 이준익 감독 [레진스낵 제공]
‘아버지의 집밥’ 이준익 감독 [레진스낵 제공]

이야기를 만들고, 그것을 누군가 연기하고, 그 모습을 찍고 편집하는 스토리텔링의 기본 방식은 영화나 숏폼이나 큰 차이가 없다. 다만 다른 게 있다면 프레임이었다. 카메라도, 감독의 모니터도 하나같이 가로형이 아닌 세로형으로 대체됐다. 감독은 좁은 프레임 안에 무엇을 어떻게 담을지 고민해야 했다. 이 감독이 도달한 결론은 “가로형이 풍경화라면, 세로형은 인물화”라는 것이었다.

실제 숏드라마 ‘아버지의 집밥’에선 이른바 ‘패닝’(카메라를 평행하게 움직여 프레임을 이동하는 촬영)을 거의 볼 수 없다. 거의 모든 장면이 캐릭터 한 사람의 표정과 행동을 담는다.

덕분에 보는 이들은 평생 해보지 않은 밥을 차리느라 난감한 하응과, 40년 결혼 생활을 ‘밥’으로 불리며 살아온 아내 순애(이정은 분), 힘든 직장 생활 속에 엄마의 집밥을 그리워하는 아들 명복(변요한 분)의 표정과 감정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 마치 누군가의 초상을 감상하듯, 프레임에 가득 찬 얼굴에서 느껴지는 감정의 깊이는 영화가 주는 그것과는 분명 다르다. 감독이 주목한 곳도 여기다.

“풍경화에는 여러 인물이 군상으로 담기지만, 세로 화면에는 한 사람만 있잖아요. 아마 같은 시나리오를 가로로 찍었다면 ‘관계’에 더 집중했겠지만, 세로형 프레임에선 단독 인물과 직접 교감하는 방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나이 든 하응·순애뿐 아니라 젊은 하응·순애, 며느리, 동생, 손녀딸까지 개별적으로 그들의 삶이 나에게 일대일로 다가오게 되는 거죠.”

‘아버지의 집밥’ [레진스낵 제공]
‘아버지의 집밥’ [레진스낵 제공]

감독의 말대로 그가 숏드라마를 연출하게 된 것은 그저 떠밀려온 결과일지도 모른다. 이 감독은 그것을 ‘도전’이 아닌 ‘응전’이라 표현했다. 그가 보기에 숏폼은 ‘개인주의’가 보편화된 시대에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다. 흐름을 바꿀 수 없다면 거기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것, 그가 ‘아버지의 집밥’을 통해 보여준 응전은 바로 ‘숏폼의 한계를 부수는 것’이었다.

“지금의 미디어 환경은 세대별로 분극화돼 있어요. 어르신들은 여전히 TV 채널을 돌려가며 콘텐츠를 보고, 젊은 세대는 혼자 넷플릭스를 보죠. 세대마다 서로 다른 플랫폼, 다른 자극에 익숙해져 있는 거예요. 이걸 하드웨어적으로 통합할 방법은 없지만, 세대를 아우르는 ‘내용’을 만들어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고 생각해요.”

누구나 공감할 수 있고, 오히려 가족이 함께 보고 나눴을 때 더욱 풍성해지는 드라마. 모바일 기기로 혼자만 보는 것이라는 숏드라마의 편견을 깨고, 이 감독이 ‘아버지의 집밥’을 ‘가까운 가족과 나누기 좋은 영화’라고 소개하는 이유도 이 목표의 연장선이다. 단절의 시대, 이 작품을 통해 그가 이루고자 하는 바람은 이야기로 연결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아버지의 집밥’은 할아버지와 며느리, 아들, 손자, 손녀까지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이야기예요. 디바이스가 달라도 링크 하나로 넘나들며 공유할 수 있는 콘텐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마치 세대 간에 공통의 정서를 공유하게 하는 일종의 시냅스(뉴런과 뉴런을 연결하는 부위) 같달까요. 세대별로 자극이 갈라져 반복되고 있는 지금에, 이런 콘텐츠가 그 사이를 연결하는 다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아버지의 집밥’ [레진스낵 제공]
‘아버지의 집밥’ [레진스낵 제공]

현재 극장에서 상영 중인 ‘아버지의 집밥’처럼, 세로형 숏폼이 다시 스크린에 걸리는 일이 생길지는 아무도 모른다. 전적으로 관객들의 선택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 감독은 ‘숏폼’이 영화의 대안, 혹은 영화의 하위 개념이 아니라는 점만큼은 분명히 했다. “숏폼은 영화가 미처 담아내지 못하는 부분을 집요하고 지속적으로 전달하는 매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결국에 중요한 것은 그릇이 아닌 그 안에 무엇을 담느냐다.

영화가 잘 차려진 상을 관객에게 대접하는 느낌이라면, 세로 화면은 관객이 보고 싶은 것을 집요하게 관찰하게 해주는 느낌이에요. ‘아버지의 집밥’도 들여다보면 뭘 먹든 가족끼리 따뜻하게 먹는 게 중요하다는 것, 그리고 그 안에서 할아버지의 집밥, 아들의 집밥, 손녀의 집밥이 각기 다른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 담겨 있거든요. 3대를 이렇게 풍부하게 보여주는 작품은 흔치 않고, 그것은 숏폼이라는 형태이기에 가능했던 일이라 생각합니다.”


balm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