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기회의 땅으로만 생각했던 베트남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수도 하노이까지 직항편 하나 없어, 경제 수도이자 옛 자유월남의 중심인 남부 호치민에서 군용기를 개조해 만든 국내선으로 갈아타고, 또 다시 좁은 국도길을 차로 4시간 가까이 달려 도착해야 했던 하이퐁 공장 땅까지의 기나 긴 여정은, LS전선이 베트남에서 겪어야 했던 각종 시행착오의 암시였다.
실제 LS전선이 베트남에 처음 만든 LS비나는 사업 초기, 잘못된 시장 분석과 합작 파트너 문제, 여기에 동남아를 휩쓴 경제위기까지 더해지며 폐업 직전까지 갔다.
당시 LG전선이던 지금의 LS전선은 1992년, 베트남 진출을 위한 TFT를 구성, 제품 진출과 생산법인 설립을 검토했다. 급증하는 전력 수요와, 빈약한 전력 케이블 공급, 전체 물량의 90%를 수입에 의존하는 베트남 전선 시장의 상황은 LS전선 뿐 아니라, 모든 글로벌 전선 회사에게 말 그대로 엘도라도였다.
3년의 준비 끝에 1995년 베트남 최대 전선 회사 휴막과 합작 계약을 체결하고, 이듬 해 LS비나를 설립한다. 비교적 단순 공정인 중, 저압 케이블과 절연전선, ACSR을 제조, 공급하는 공장이였다. LS전선은 당시 베트남이 향후 10년간 송배전선 수요가 연간 400~500억 원을 넘고, 또 LS비나가 시장 점유율을 40% 이상을 달성할 것으로 자신했다.
하지만 현실은 결코 LS전선만을 위해 펼쳐지지 않았다. LS비나는 합작사 설립 이후 곧바로 위기에 직면했다. 사업초기 실적은 참담했다. 공장 가동 첫해인 1997년 매출 600만 달러에 손실은 130만 달러에 달했다. 30%가 넘는 영업손실은 다음 해도, 또 그 다음 해도 계속됐다. 베트남 내 전선 수요는 예측과 달리 호찌민 인근 지역이 전부였고, 베트남 전력청의 연간 입찰액도 2000만 달러에 못미쳤다.
여기에 합작 파트너까지 문제를 일으켰다. 파트너사 사장은 부정 축제를, 현지 정부는 공산주의 국가의 만장일치제도에 의한 의사결정을 고집했다. 한국에서는 IMF까지 겹치면서, 본사는 과중한 이자율 부담 등을 이유로 사업 철수까지 고려했다.
이 때 LS전선이 택한 카드는 손 쉬운 철수가 아닌, 힘든 구조조정이였다. 우선 문제의 합작선 사장을 해고하고, 신규 설비를 도입해 생산능력을 향상시켰다. 또한 조직 인원 축소 등 고정비 감소와 분위기 쇄신을 위한 노력, 철저한 상벌주의 및 목표 개념 도입으로 내부 관리시스템을 정비하는 등 기존과는 다른 LS-VINA를 만들고자 노력했다.
이렇게 회사가 바뀌자 실적도 자연스럽게 달라졌다. 2001년 첫 흑자를 기록했다. 2003년에는 누적적자를 해소하고, 2004년에는 처음으로 배당까지 실시할 수 있었다. 매출은 2001년 2300만 달러에서 2005년 5400만 달러로 급속히 늘어났다.
회사 관계자는 “현지 사정을 잘 간파하지 못한 채 뛰어든 사업 초기의 시행착오는 오히려 약이 됐다”며 “베트남 직원 스스로의 손으로 일할 수 있는 사업구조를 만들면서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았다”고 전했다. 위기 극복 과정에서 한국에서 건너간 주재원들은 장기적인 목표를 제시하고, 베트남 직원들은 주인의식을 갖고 생산성을 높인 것이 지금은 베트남 최고의 전선 회사 LS전선아시아가 될 수 있는 비결이라는 설명이다.
실제 LS비나 직원 430여명 가운데 한국인은 법인장, 관리담당, 영업당당 3명이 전부다. 생산부터 제품설계, 영업, 기획, 인사, 구매, 회계 등 거의 모든 업무를 베트남 직원들이 처리한다. 이직이 잦은 베트남에서 평균 근속연수가 9년에 이르고, 100명이 넘는 대졸 사무직이 핵심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그리고 LS비나는 2006년 매출 1억 달러, 2010년 2억 달러를 기록했고, 영업이익도 2008년부터 10%를 훌쩍 넘어섰다. 현재 LS비나는 베트남 내수를 넘어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호주 등 동남아 주변국은 물론 아프리카와 남미에서도 주문이 쉴 틈 없이 몰려드는 베트남 최고의 수출 기업이 됐고, 베트남 정부는 수출유공자상과 노동훈장으로 LS비나를 지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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