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수원세관을 격려 방문하면서 직원들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있었다. 한 주무관이 손을 들고 조심스레 물었다.

“관세청에서 근무하신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업무나 사건은 무엇입니까?”

지난 30여년의 시간을 한 꺼풀씩 들춰봤다. 1994년 제주세관에서 첫 공직 생활을 시작한 이후, 관세 행정이라는 넓고도 깊은 바다를 항해하며 수많은 파도와 마주했는데 유난히 선명하게 떠오르는 순간이 있다. 바로 기획재정담당관 시절, 관세청 역사상 처음으로 국회에서 예산을 증액받았던 일이다. 감시정 확보를 위한 23억원의 증액이었다.

당시 주변 분위기는 차갑고 회의적이었다. 도움을 구하며 여러 문을 두드렸지만 돌아온 답은 대체로 “정부안이나 잘 지켜라”는 무심한 충고였다. 불가능하다는 말이 반복될수록 오히려 마음속에는 ‘반드시 해 내겠다’는 오기가 더 단단히 자리잡았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예상치 못했던 한 분이 “이 일은 꼭 필요하다”며 먼저 손을 내밀어 주셨고, 그 응원의 한마디가 결국 결과의 문을 열어 주었다.

그때의 경험은 공직 생활에 있어 하나의 이정표가 됐다. 이후 감시 장비 확충과 현장 대응 능력 강화와 같은 추가적인 성과들이 이어질 때마다, 우리가 처음 내디뎠던 그 발걸음이 씨앗이 됐다는 사실에 깊은 보람을 느꼈다. 열악한 조건에서의 첫 시도는 늘 어렵고 외롭지만, 누군가의 단단한 신념과 작은 성공이 뒤이어 올 변화의 출발점이 됨을 체감한 순간이었다.

그날 수원세관 직원들에게 ‘안경’ 이야기를 건넸다.

같은 풍경도 어떤 색의 안경을 쓰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보인다. 업무도 그렇고 삶도 마찬가지다. 부정의 안경을 쓰고 바라보면 모든 일이 어렵고 부담스럽게만 느껴진다. 긍정의 안경으로 보면 장애물 너머에 있는 기회와 의미가 더 선명하게 보인다.

우리의 마음이 슬픔과 피로, 부정의 늪에 빠져 있을 때는 주변에 아무리 좋은 사람과 훌륭한 성취가 있어도 그것이 마음에 닿지 않는다. 마음이 기쁨과 긍정으로 차오를 때는 다소 불편한 상황도 넉넉히 끌어안을 여유가 생긴다. 결국 ‘세상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가’가 더 큰 영향을 미친다.

관세 현장은 때로 빠르게 변화하고 예측하기 어렵다. 정책환경도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국민의 기대 역시 높아지고 있다. 그럴수록 한 조직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거창한 구호나 눈에 띄는 성과 이전에, 구성원 개개인이 쓰고 있는 ‘마음의 안경’을 점검하는 일일지 모른다.

어떤 안경을 쓰느냐에 따라 같은 난관도 극복의 단서가 되고, 같은 부담도 도전의 기회로 바뀐다.

저마다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직원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부정의 안경을 벗고, 긍정의 안경을 걸어 보자고.”

그 안경은 상황을 바꾸지는 못할지 몰라도 상황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을 바꾸고, 그 마음이 결국 일을 바꾸며, 일이 모여 세관을 바꾸고 관세청 전체를 변화시키는 힘이 된다.

삶의 무게가 조금 더 가볍게 느껴지고, 조직의 미래가 한층 더 밝아 보이는 것은 긍정이 주는 작은 기적이다. 그 기적은 언제나 우리 마음속에서 시작된다.

가난한 시골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 펌프 앞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깊은 지하수는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그 물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바로 ‘마중물’을 붓는 일이었다. 손에 든 작은 물 한 바가지는 늘 아까웠다. 목이 마른 여름날에는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마중물을 아끼면 결국 아무 물도 얻지 못한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알게 되었다. 작은 물 한 바가지를 아낌없이 부어야만 더 큰 물줄기가 솟구치는 법이었다.

세월이 흘러 관세행정의 길을 걸으며 종종 그 펌프 앞의 기억을 떠올린다. 인생도 행정도, 결국 원리는 같다. 먼저 심어야 거둘 수 있고, 먼저 움직여야 변화가 찾아온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한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마중물을 붓는 마음, 그 첫걸음을 내딛는 용기가 모든 성과의 출발점이 된다.

최근 충북 음성에서 열린 K-뷰티 간담회에 참석했을 때, 한 기업 대표가 들려준 이야기를 잊을 수 없다.

“10여 년 전만 해도 화장품을 수출하겠다고 하면 다들 바보 취급했죠.”

그 말에 모두 웃었지만 웃음 속에는 묵직한 현실의 벽과 이를 뚫어낸 자부심이 함께 배어 있었다. 지금 대한민국은 연간 수출 100억달러를 돌파한 세계 3위의 화장품 수출국이다. 누군가의 조롱으로 시작된 꿈이 이제는 세계 시장을 뒤흔드는 현실이 된 것이다.

이 변화는 어느 한 기관만의 성과가 아니다.

식품의약품안전처, 중소벤처기업부, 보건복지부의 정책적 노력, 산업계의 혁신, 그리고 관세청의 보이지 않는 역할이 함께 어우러져 만들어낸 결과다. 수출 지원과 위조 화장품 단속 같은 ‘마중물’을 제때, 그리고 꾸준히 붓지 않았다면 K-뷰티의 급성장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특히 관세청이 마련해 추진 중인 GLOW-K 전략은 한국 화장품이 세계 속으로 뻗어나가는 데 더욱 힘을 실어주는 또 하나의 마중물이다. 작은 물 한 바가지처럼 보였던 정책 하나, 단속 하나, 지원 하나가 결국 수출 100억달러라는 물줄기로 이어진 것이다.

일본 간이해상특송절차의 도입 또한 마찬가지다.

처음 일본 세관당국을 설득하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반응은 냉랭했다. “일본에서는 어렵다”, “전례가 없다”, “한국식은 일본에 맞지 않는다”는 말들이 반복됐다. 몇 년간 끈질기게 설득하고 설명하고 이해를 구한 끝에 결국 일본도 이 제도를 받아들였다.

그 과정에서 결정적인 힘이 되어준 것은 ‘긍정의 안경’을 쓰고 일하는 직원들의 태도였다. “안 됩니다”는 말보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라고 묻는 자세, 거절을 경험해도 다시 문을 두드릴 줄 아는 끈기, 작은 가능성 하나를 발견하면 그것을 끝까지 붙드는 낙관의 힘. 이 모든 것이 모여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원동력이 되었다.

지금도 믿는다. 관세 행정의 성과는 결국 ‘마중물을 아끼지 않는 마음’, ‘긍정의 안경을 쓰고 일하는 자세’에서 나온다고.

작은 한 걸음, 사소하게 보이는 시도, 해볼 수 있다는 믿음. 그것들이 모여 우리 경제를 움직이고, 수출을 키우고, 국가 경쟁력을 만드는 것이다.

시골 농부의 아들은 펌프 앞에서 그 진리를 배웠고, 지금 관세청장으로서 다시 한번 확신한다.

우리가 붓는 모든 마중물은 반드시 누군가의 희망을 끌어올리고, 우리 산업의 미래를 솟구치게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포기하지 않는 마음, 늘 긍정의 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는 일이다.

이명구 관세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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