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대에 예술 만개한 문화계 거장들
伊 라스칼라 최초 亞 음악감독 정명훈
韓 최초 아카데미 조연상 받은 윤여정
시대와 세대 넘나든 ‘혁신가’ 가왕 조용필
![정명훈 [KBS교향악단 제공]](https://wimg.heraldcorp.com/news/cms/2025/05/21/ams.V01.photo.HDN.P.20210616.202106160000002162529874_P1.jpg)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나이가 들며 많은 것을 경험했어요. 더 젊어지고 싶은 마음은 요만큼도 없어요. 누가 젊어질 수 있다고 해도, 절대 안 할 거예요.”
‘오페라 종가’ 이탈리아 라스칼라 극장의 음악감독으로 선임된 세계적인 ‘지휘 거장’ 정명훈은 최근 기자들과 만나 이렇게 말했다.
세계적인 마에스트로 정명훈, 가왕(歌王) 조용필, 배우 윤여정…. ‘예술 인생’은 70대부터다. 한국 문화계를 이끄는 각 분야 명장의 시간은 천천히 흐른다. 70대 거장들에게 나이는 숫자에 불과했다. 오랜 경륜과 지치지 않는 도전 정신으로 이들은 해마다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고 있다.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Ars longa, vuta brevis)’. 기나긴 예술의 세계를 독파하기엔 인간의 삶은 너무도 유한하다는 히포크라테스의 잠언은 시대를 초월해 예술가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허명현 음악평론가도 “예술은 깊고 넓은 분야”라며 “예술의 깊이에 비하면 인간의 수명은 정말 짧고, 그마저도 건강하게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은 너무나 짧다”고 했다.
이런 이유로 문화예술인의 시계는 단 하루도 멈추지 않는다. 무한한 예술 앞에서 ‘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아 늘 ‘청년’으로 살기 때문이다. 오래도록 연마해 온 ‘장인’들의 깊이는 나이테처럼 한 줄씩 새겨진다.
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인 류태형 음악평론가는 “다양한 분야, 특히 음악 미술 등 분야에서 70대는 본격적인 예술이 꽃을 피우는 발화기라 할 수 있다”며 “깊이 있는 표현, 임기응변과 대처 능력 등 모든 면에서 쌓인 연륜의 힘이 나온다”고 봤다.
![정명훈 [마스트미디어 제공]](https://wimg.heraldcorp.com/news/cms/2025/05/21/news-p.v1.20250102.36c61a81d5e64377a128c2a8a0215fca_P1.jpg)
70대에도 써 내려가는 새 역사…거장들의 이정표
세계적인 마에스트로 정명훈(72)은 최근 또 하나의 역사를 썼다. 라스칼라는 지휘자 정명훈을 오는 2027년부터 신임 음악감독으로 선임한다고 밝혔다. 그는 라스칼라 247년 역사상 첫 동양인 음악감독이다.
정명훈의 선임은 ‘오페라 종주국’의 비(非) 이탈리아인 음악감독이라는 점에서 세계 음악계에서도 화제였다. 영국 클래식 음악계의 독설가인 노먼 레브레히트는 ‘충격적 선택’이라고 했고, 프랑스 ‘레 제코’는 “라스칼라의 혁명적 임명자”라고 했다. 그만큼 까다롭고 자존심 높은 이탈리아의 마음을 얻었다는 점이 내내 화제였다. 정명훈과 함께 경합을 벌인 지휘자는 이탈리아 출신으로 강력한 외부 지지세력을 가진 다니엘레 가티다. 정명훈은 이사회의 만장일치로 선임된 것은 물론,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압도적 지지를 얻었다. 실제로 단원들은 이사회에 “정명훈과 함께하고 싶다”는 의견을 전달했다. 정명훈은 “라스칼라 극장에서 일하는 사람들까지 모두 저를 원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귀띔했다.
국적에 대한 부분을 제외하면, 국내 음악계 전문가들도 “언제 선임됐어도 이상하지 않은 선택”이라고 입을 모은다. 허명현 평론가는 “공연의 횟수는 물론 단체와의 정서적인 면에서도 라스칼라와 누구보다 가까운 지휘자가 정명훈”이라고 했다. 류태형 평론가도 “라스칼라는 물론 베를린필의 상임 지휘자가 되거나 빈필하모닉과 신년음악회를 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며 “정명훈은 한국의 지휘자가 아닌 세계인의 명인”이라고 말했다.
피아노로 음악을 시작한 정명훈은 1974년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2위에 오르며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당시 한국은 더 화제였다. 엄혹한 시기 한국에 날아온 낭보에 그는 도심 카퍼레이드를 하며 온 국민의 뜨거운 찬사를 받았다. 한국 클래식계에 난데없이 등장한 천재 음악가였던 것이다. 그는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다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니 부지휘자로 지휘계로 발을 디딘 이후 유럽 주요 무대를 휩쓸었다. 불과 36세의 나이에 프랑스 파리 국립 오페라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을 맡았고, 세계 최정상 악단을 매만졌다. 여러 차례 전성기를 보냈지만, 또 한 줄 올리게 된 ‘라스칼라 음악감독’이라는 직함은 정명훈은 여전히 살아 숨 쉬는 거장이라는 증명이기도 하다.
![조용필&위대한탄생 콘서트 [YPC 제공]](https://wimg.heraldcorp.com/news/cms/2025/05/21/news-p.v1.20241125.405a67da80aa4f279a707e2474d8f43b_P1.jpg)
클래식 음악계에 정명훈이 있다면, 대중음악계엔 가왕 조용필(75)이 있다.
1960년대 대중음악의 산실이었던 미8군 무대 ‘화이브 핑거스’로 데뷔(1968년)한 조용필은 지난 57년간 대한민국 최고의 보컬리스트였고, 최초의 한류스타이자 아이돌이었다. 대중음악계는 그 어떤 분야보다 트렌드의 변화와 세대교체가 빠르지만, 조용필은 지금도 늙지 않는 음악‘을 부른다.
1975년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발표하며 큰 인기를 끌었고, 1980년 ‘창밖의 여자’, ‘단발머리’ 등이 수록된 1집으로 국내 가요계 사상 첫 밀리언셀러를 기록하며 한국과 일본을 사로잡은 대형 스타로 떠올랐다. 국내 최초 단일 앨범 100만장 돌파, 최초 누적 앨범 1000만장 돌파, 국내 가수 최초 일본 NHK홀 공연 및 ‘홍백가합전’ 출연, 한국 가수 최초 미국 뉴욕 라디오시티 공연, 국내 가수 최초 미국 카네기홀 공연 등의 기록을 세웠다.
2013년 발표한 19집 ‘헬로’(Hello)의 수록곡 ‘바운스’(Bounce)는 당시 K-팝 그룹들을 제치고 음원차트 정상에 올랐다. 지난해 공개한 정규음반 ‘20’은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유일하게 ‘가왕’으로 불리는 보컬리스트 조용필의 다채로운 음색을 만날 수 있는 음반이다. 이 앨범엔 반세기 넘게 무대에 섰던 가왕의 여정과 고민, 앞으로 향해갈 길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타이틀곡 ‘그래도 돼’는 심지어 3040 세대의 힐링송으로 자리매김했다.
임진모 대중음악평론가는 “조용필은 1980년대부터 앨범 한 장 한 장에 예술성을 추구하고 변화를 도모한 실험주의자였다”며 “자신과 함께 해온 세대를 뛰어넘어 지금의 세대를 바라보는 음악활동을 이어가고 있다는 점이 단연 돋보인다”고 말했다.
![한국의 배우 윤여정이 지난달 25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LA)의 유니언 스테이션에서 열린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 참석하고 있다. [연합]](https://wimg.heraldcorp.com/news/cms/2025/05/21/ams.V01.photo.HDN.P.20210518.202105180000003471751121_P1.jpg)
59년 차 배우 윤여정(78)은 70대에 배우로서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2021년 영화 ‘미나리’(2020년)로 한국인 최초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가져간 것이다. 아시아 배우로는 두 번째 수상이었다.
1966년 TBC(동양방송) 탤런트 공채를 통해 배우가 된 윤여정은 활동 초창기부터 두각을 보인 배우였다. 당시 라이벌 채널이던 MBC로 스카우트된 뒤, 드라마 ‘장희빈’을 통해 대중에게 확실한 눈도장을 찍었다. ‘화녀’로 영화에 데뷔했을 땐, ‘천재 여배우’가 탄생했다는 극찬을 받았다.
20대 시절부터 윤여정의 길은 남들과는 달랐다. 여배우라면 으레 거쳐야 하는 수영복 화보도 찍지 않았고, 자기만의 길을 묵묵히 걸었다. 결혼 이후 한동안 연기 활동을 멈췄다가, 1987년 김수현 작가의 MBC ‘사랑과 야망’으로 복귀했다. ‘이혼녀’는 방송 출연이 안 된다는 ‘시대의 금기’를 깬 활동이었다. 2000년대에 접어들었을 땐 ‘바람난 가족’, ‘돈의 맛’, ‘죽여주는 여자’ 등 끊임없이 전형성을 깨는 연기로 관객과 만났다.
윤여정의 아카데미 수상은 전 세계에서 화제였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윤여정이 한국 배우 최초로 오스카상을 수상하며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고 했고, 로이터 통신은 “윤여정은 한국에서 수십 년 동안 센세이션한 배우였고, 재치있고 시사점이 많은 역할들을 가장 자주 연기했다”며 수상 소식을 타전했다.
화면 속의 윤여정을 넘어 현실에서도 촌철살인의 언변과 진취적이고 개방적인 가치관, 과장 없는 쿨한 태도, 어떤 상황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 당당한 우아함으로 젊은 세대에게 큰 지지를 받고 있다.
청년의 치열함·멈추지 않는 도전·끝없는 탐구…지금도 건재한 이유
예술가에게 있어 70대는 그간 몰두해 온 분야가 무르익어 저마다의 무기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을 만큼 재능과 깊이가 만개하는 시기다. 70대 명장들이 지금도 새로운 이정표를 세워갈 수 있었던 것은 끝없는 탐구와 공부, 자기 계발 때문이다.
![정명훈 지휘자가 아시아인 최초로 라 스칼라 극장의 음악감독직을 맡았다. [연합]](https://wimg.heraldcorp.com/news/cms/2025/05/21/rcv.YNA.20250519.PYH2025051914600005100_P1.jpg)
정명훈은 “아내는 나더러 일평생 해온 게 지휘인데, 왜 예전보다 공부를 더 많이 하냐고 묻는다”며 “이만큼이라도 하기 위해 더 깊이 파고들어 가는 것”이라고 했다. 스스로는 언제나 “60대가 돼서야 지휘에 대해 조금 알게 됐다”며 “지금도 바보인데 옛날엔 더 바보였다. 그래서 누가 젊어질 수 있다 해도 예전으론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전문가들은 정명훈의 음악에 대해 “시간이 흐를수록 느긋함과 깊이가 더해진다”고 입을 모은다. 류태형 평론가는 “여러 면에서 조급함이 사라져서 안정적이다. 정명훈 지휘자가 포디움에 서면 마음이 놓이는 경험을 하게 된다”고 했다. 허명현 평론가는 최근 KBS교향악단과 함께 한 말러 연주를 언급하며 “2010년대 서울시향과 했던 말러와는 또 달라진 깊은 말러의 세계를 관객들에게 보여줬다”며 “시간과 연륜을 통해 쌓은 깊이가 남다르다”고 말했다.

윤여정은 ‘배우로의 삶’에 대해 늘 “살기 위해 목숨 걸고 한다”며 “배우가 편하면 보는 사람은 기분 나쁜 연기가 된다. 한 장면 한 장면 떨림이 없는 연기는 죽어있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카메라 앞의 그는 사랑스러운 할머니였다가 현대사의 모진 시간을 표정마다 새기고, 때론 도발과 관능을 넘나든다.
배우 전도연은 그에 대해 “동시대를 살아가는 같은 여배우로서 끊임없이 작품을 하는 모습을 보며 많은 여배우들에게 자극을 주는 모습이 너무나 좋다”고 했고, 배두나는 “윤여정 선생님은 상대방에게 영감을 주는 분이다. 상대 배우가 눈만 봐도 몰입할 수 있게 만든다”고 했다. 배우 이순재는 “윤여정은 역할을 대충하거나 상식적으로 해석하는 배우가 아닌 여러 가지로 분석을 해서 새로운 캐릭터를 창조해내는 능력과 의지를 가진 배우”라고 극찬했고, 박근형은 “‘장희빈’ 시절 함께 호흡을 맞출 때부터 총명하고 명석했다. 윤여정 같은 배우가 서너 명만 있어도 중년 배우들의 판도가 바뀔 것”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가왕 조용필 [YPC 제공]](https://wimg.heraldcorp.com/news/cms/2025/05/21/ams.V01.photo.HDN.P.20180912.201809120000004205144274_P1.jpg)
조용필 역시 57년의 세월 동안 싱어송라이터이자 보컬리스트로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았다. 그는 명실상부 대중음악계의 혁신가다. 모든 장르를 넘나들었고, 시대와 소통하며 트렌디한 음악을 만들어왔다. 전문가들은 “조용필은 그 시대마다 각각의 환경에 주어지는 최고의 사운드와 편곡, 멜로디와 화성 진행을 담아낸 좋은 팝을 목표로 만드는 아티스트“(임희윤 대중음악평론가)라고 말한다.
이 시대 ‘최고의 팝을 만들기 위해 조용필은 끊임없이 창법을 연구하며 변화를 만들어간다. 측근들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목소리에 대한 아쉬움과 부족함을 고민하는 보컬리스트다.
조용필은 “무수히 연습하며 이 곡에 이 창법이 어울리는지 아닌지를 판단한다. 하다못해 스마트폰으로도 녹음해 작은 스피커로 듣고 또 들어본 뒤에 본격적으로 창법을 결정한다”며 “이런 과정을 거쳐 실험하고 연구하는 것이 재밌다”고 했다.
정민재 대중음악평론가는 “조용필은 지난 반세기 동안 늘 다양한 음악을 해왔다”며 “트렌디한 사운드를 추구하는 것은 물론 일렉트로닉 장르로의 확장, 현재 대중음악계에서 중요하게 활동하는 한국 작사가들과 고른 협업을 통해 젊은 세대와 기성세대를 아우르는 곡들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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