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수결 원칙 따른 의사결정 진정한 민주주의 실현 역부족 투표보단 적극적 참여·소통 ‘갈등 공화국’ 오명 벗어나야

최근에 일본 메이지 대학에서 숙의민주주의에 대한 국제 학술심포지엄이 있었다. 주최국인 일본의 학자들이 특히 관심을 보인 것은 스탠퍼드 대학의 제임스 피시킨 교수가 발표한 ‘숙의형 여론조사(Deliberative Polling)’ 방법이었다. 사회 현안에 관련되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무작위로 대표단을 선정하여 그들로 하여금 숙의 과정을 통해 합의에 도달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단순화하면 미국 법정에서 활용되는 ‘배심원’제도의 확대판쯤 된다.

이 방법은 자유민주주의에 결함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자유민주주의는 오늘날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과반이 넘는 지구인들이 수용하고 있는 정치 체제다. 동구권이 무너지고 냉전이 끝날 무렵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자본주의와 결합한 자유민주주의에 맞설 정치체제가 모두 소진되었다는 의미에서 ‘역사의 종언’을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의 결함에 대해서는 그동안 수많은 비판이 제기되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경제적 불평등에 초점을 둔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해 권력의 불평등에 초점을 둔 엘리트주의, 국가관료제 개입의 비효율성에 초점을 둔 시장자유주의의 비판은 고전적인 예다. 좀 더 최근에는 성 불평등에 초점을 둔 페미니즘, 환경 파괴에 초점을 둔 환경주의 등이 비판 진영에 합류했다.

이들에 비하면 숙의민주주의는 자유민주주의에 대해 비교적 온건한 비판을 가하는 셈이다. 법치를 통한 시민자유의 보장과 권력배분 그리고 주기적으로 실시되는 보편적이고 공정한 선거가 민주주의를 떠받치는 기본 원리들임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51 대 49’라는 다수결 원칙을 바탕으로 하는 선거 결과에 의해 이뤄지는 공공 의사결정은 진정한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다고 본다. 그래서 참여와 소통이 가능한 숙의민주주의를 통해 ‘민주주의의 질’을 높이자고 주장한다.

이번 학술심포지엄에서 게이오 대학의 소네 교수는 일본 ‘동북부 원전사고’ 이후 일본인들이 에너지 확보 방안으로 원전의 필요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신이 직접 실험해 본 숙의형 여론조사 결과를 소개했다. 소네 교수에 따르면 이 실험에 참여한 대표단 구성원들이 소통 과정을 거치면서 처음에 각자 가지고 있던 생각에 상당한 변화를 보였다. 이 실험 결과는 시민들이 단 한 차례의 투표보다는 숙의 과정을 통해 현안에 대해 좀 더 심층적으로 이해하게 되고 따라서 그만큼 합의 도달이 쉬울 수 있음을 보여준다.

심포지엄 참석을 위해 일본으로 가는 도중에 필자가 읽은 신문에는 강원도에서 화력 및 원자력 발전소 신축 여부를 둘러싸고 중앙과 지방 간에 그리고 해당 지역 주민들 간에 갈등이 증폭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 있었다.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된 1987년 민주화 이후 지난 25년 동안 한국의 중앙과 지방 모두에서 보편적이고 공정한 선거가 주기적으로 실시된다는 의미에서의 민주주의의 이행과 공고화는 실현되었다. 그러나 ‘갈등 공화국’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수많은 공공갈등이 발생하고 있다.

본래 이 학술대회 주최 측의 목적 가운데 하나는 ‘참여예산(Participatory Budgeting)’ 제도에 숙의형 여론조사 방법을 연계시키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1998년부터 광주광역시 북구와 울산광역시 동구가 참여예산을 실험적으로 실시해 오고 있다. 2011년에는 약 80%의 지자체들이 이 제도를 조례로 채택했다. 그러나 실제로 어떻게 시민 대표들을 포함한 위원회를 구성할 것이며, 예산운영 과정에서 무엇에 대해 어느 정도의 구속력이 있는 결정을 할 것인지 등에 대해서는 아직 논란의 와중에 있다. 후기민주주의 시대에 난무하는 공공갈등 해소를 위해서라도 숙의민주주의 방식을 진지하게 적용해보는 시도들이 절실한 오늘의 한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