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7회> 모든 길은 하나로! (6)

글 채희문 | 그림 유현숙

권도일은 70년대 식 전화벨소리에 놀라 눈을 떴다. 겨우 밤 9시를 조금 넘은 시각이었지만 깊은 잠에 빠져 있었던 모양이다. 아마도 종일토록 긴장했다가 열 대 여섯 개가 넘는 호텔을 유람 다닌 피로가 겹쳤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권 도일 선생! 나는… 아까 낮에 만나보았던 도형철이라 하오.”

“아… 네, 골프선수였다던…”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꼴푸 선수로서 이름을 일떠세우긴 했디요, 허허… 내가 전통을 때린 이유는 말이오, 공인으로서가 아니라 남자 대 남자 개인자격으로서 술이나 한 잔 하고 싶어서요.”

도형철은 전화기 너머에서 호탕하게 웃고 있었다. 그는 이를테면 공적인 만남이 성공리에 이루어졌으니 사적으로 만나 술이나 한 잔 하자는 것이었다.

“어디까지나 공적인 담화는 끝냈고… 이제부터 사적인 담화를 하자는 겁네다. 선생께서도 물론 남남북녀라는 말을 들어 보셨갔지요?”

“사적인 대화를요?”

“호상 간에 사적인 담화시간이 없었잖소?”

“아, 그렇군요. 당장 만나지요.”

소위 사적인 담화는 이런 식으로 이루어 졌는데… 마음속에 짜릿하게 와 닿는 부분은 바로 남남북녀를 들먹이던 도형철의 노오란 목소리였다. 어쨌거나 권도일은 옷을 새로 다려 입고 평양호텔 지하에 있다는 ‘빠’로 내려갔다.

“땅 속 2층까지 내려오시면 보령구장이 보입네다. 거길 지나서 바른쪽으로 꺾어 돌면 빠가 나오는데… 거기서 어떤 처자가 기다리고 있습네다. 훤칠한 미모를 지닌 처자입네다. 그 미인과 마주앉아 맥주를 마시면 얼마나 신나갔소?”

권도일은 계속 들려오는 낯 선 단어가 신기했다. 빠는 낯설었지만 그럭저럭 알만했다. 보령구장이란 아마도 볼링장을 일컫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어떤 처자? 훤칠한 미모를 지닌 처자?

“남남북녀라… 빠에서 기다리는 처자가 권 선생을 벼르고 있으니 마음 단단히 고쳐 잡고 나오시오. 알갔디요? 허허허!”

체제와 사상이 우리와 다른 곳에 홀홀단신으로 입국해서 어찌 외간여자를 탐할 수 있으랴. 모름지기 도형철이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떠본 농으로 여길 뿐이었다.

“여기외다, 권 선생!”

실내는 썰렁했고 매우 어두웠다. 도형철은 빠의 구석자리를 잡고 앉아 손을 흔들고 있었다. 권도일은 함께 손을 흔들어 응대하며 천천히 그에게로 걸어갔다. 잠시 후 어두움이 눈에 익어 사물을 제대로 분별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이런, 이런! 권도일은 그만 훅! 하고 숨을 몰아 쉴 수밖에 없었다.

“이 처자는 활동사진작가외다. 어떠시오? 미모가 뛰어나지 않소? 게다가 권 선생을 사모하는 마음이 화통 같으니 이를 어쩌우?”

“안녕세요? 예원희라고 해요.”

도형철과 그녀가 거의 동시에 인사를 했지만… 숨을 몰아쉬고 있는 권도일의 귀에는 그녀의 목소리만이 또렷이 들려올 뿐이었다. 비록 수인사에 불과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무척 아름다웠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억양은 부드러운 서울 말씨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으니…

“예… 예… 예원희 씨라고 하셨나요?”

권도일은 말을 더듬거릴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이걸 어쩌나! 이토록 숨 막힐 정도로 예쁜 여인이 어째서 북한 땅에 살고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