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5> 붉은 길, 푸르른 마음 (33)
글 채희문 | 그림 유현숙
낭만적인 사람은 예술에 앞서 인생을 깨닫는다. 그렇기 때문에 외설스러운 장면에 닥쳤을 때에도 낭만을 아는 사람은 외설에서 예술을 읽어낸다. 예술이 곧 인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 멀리 복도 끝에 쪼그려 앉은 강유리의 스커트 속을 훔쳐보는 유호성은 오히려 예술에서 외설을 찾아낼 따름이었다.
‘꿀꺽!’
고요한 순간… 더구나 긴장한 상태에서 침 삼키는 소리는 본인의 귀에 엄청나도록 크게 들려온다. 어린 시절, 여자 목욕탕을 훔쳐보거나 연애하는 청춘 남녀의 모습을 훔쳐볼 때에 유독 침 삼키는 소리가 컸던 기억은 누구에게나 남아있을 것이다. 그랬듯이 지금 유호성은 제 침 삼키는 소리에 제 스스로 놀라며 그녀의 허벅지를 훔쳐보고 있었다.
“땡그랑!”
잠시 후, 복도 카펫 위를 똑바로 굴러오던 작은 공이 유호성의 발끝 언저리에서 멈추는가 싶더니 경쾌한 소리가 울려나왔다. 그는 소리 나는 곳을 내려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공이 때리고 간 와인 잔 위에는 동심원의 파문이 번지고 있었다.
옆을 보니… 어머니 신희영과 여동생 유한솜은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두 사람은 안대로 눈을 가린 채 숙면 중이었으므로 그는 두 사람이 깨지 않도록 조용히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백발백중입니다, 유리 씨!”
성큼성큼 복도를 따라 걸어온 유호성이 퍼터를 낚아채며 말했다. 하긴 그 순간까지만 해도 그는 강유리의 진가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다.
“유리 씨라고요? 그럼 그렇지! 골프선수 강 유리… 맞지요?”
“그래요? 이 분이 광고계의 샛별 강유리 선수?”
유호성이 강유리의 이름을 부르기가 무섭게 주변 좌석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아하! 그랬구나! 그녀는 어느새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구나! 비행기의 조명이 어두웠기 때문에… 게다가 비행기 좌석 배치 상 모두 앞을 바라보고만 있었기 때문에… 승객들은 미처 그녀의 얼굴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럼 복도에서 퍼팅을 하기 위해 서성이는 동안에는 어째서 아무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냐고? 그야 말하면 잔소리…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사내들 모두가 그녀의 스커트 옆 자락, 이를테면 길게 터진 틈으로 드러난 허벅지를 훔쳐보느라 여념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싸인 좀 부탁해요, 누나.”
“강유리 선수… 악수 부탁합니다. 영광이에요.”
“강유리! 사랑해요! 강유리!”
객실 안은 순식간에 난장판으로 변해갔다. 느닷없는 소동에 승객들이 몰려들자 안전 비행을 고려해서인지 승무원 들이 강유리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모두 자리에 앉아서 안전벨트를 매 주세요.”
“싸인 받으실 분은 저에게 신청해주세요. 나중에 따로 받아드리겠습니다.”
결국 승무원들이 나서서 강유리를 1등석으로 모셔 간 후에야 아우성을 치던 승객들은 진정을 되찾았다. 마침 1등석 한 자리가 비어있기도 했지만, 그녀 좌석을 승급시키기 위해 새삼 운행규정을 들먹일 처지도 물론 아니었을 것이다.
“강유리 선수에게 승급 비용을 따로 받으실 거죠?”
그녀가 1등석으로 무상 승급되어 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유호성은 승무원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염병…! 질투심 때문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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