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일류 기업 도약 발판 수원 삼성전자
1969년 수원에 삼성전자 설립 日업체 TV OEM 조립으로 시작 부품 등 자체 기술개발 박차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또 도전 73세에 반도체 사업 진출 선언 국민적 우려·편견 말끔히 씻고 단숨에 ‘세계 1위’자리에 올라
호암 “내 평생 가장 잘한 일” 뿌듯 이젠 삼성의 두뇌·대들보로…
수원은 오늘날의 삼성그룹을 이야기하는 데 빠질 수 없는 곳이다. ‘초일류 글로벌 기업’ 삼성의 모든 것은 사실상 이곳에서 태동했다. 1968년 10월 수원시 매탄동에 본격적인 사업장 건설에 돌입하고 이듬해인 1969년 1월 13일 삼성전자공업주식회사가 설립되면서 오늘날의 전자왕국 삼성은 시작됐다.
물론 전자산업을 시작하기까지 삼성엔 많은 일이 있었다. 삼성상회와 삼성물산,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의 설립 이후 50년대 후반 한일은행과 안국화재, 조흥은행 등을 차례차례 인수하면서 삼성은 국내 굴지의 기업집단으로 성장한다.
“기업은 이익을 내고 그 이익으로 충분한 급료를 종업원에게 지급하고, 국가에 세금을 납부한다. 양질의 물건을 얼마나 저렴하게 국민에게 공급하느냐가 기업사명의 전부이고 존재가치”라는 호암의 경영철학 아래, 삼성의 그늘 아래 들어온 모든 사업은 급성장한다. 이 흐름은 60년대에도 지속된다.
성공의 기쁨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61년의 쿠데타로 들어선 군사정부는 그를 막대한 세금을 탈루한 부정축재자로 내몰고 당시로는 막대한 150억환의 추징금을 환수했다. 중복과세로 이익의 120%에 달하는 세금을 내야 했던 당시의 불합리한 세제를 곧이곧대로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10년에 걸친 도전을 통해 숙원인 한국비료사를 설립했지만 군사정권에 헌납한 일도 생겼다. 비료공장 건립은 50년대 연간 2억5000만달러의 원조자금 가운데 1억달러 이상을 비료수입에만 써야 했던 안타까운 현실을 보면서 호암이 숙원사업으로 결정했던 것이다. 그렇게 기쁨과 좌절이 뒤엉킨 60년대를 마감할 무렵. 호암은 세계 전자산업의 동향을 주시했다. 단순히 먹고 입는 수준의 내수산업을 넘어 해외로 뻗어나가 국부를 풍요롭게 할 수 있는 사업을 찾은 결과였다.
그는 전자산업이야말로 기술과 노동력, 부가가치, 내수와 수출전망 등에서 우리나라의 경제발전 단계에 꼭 맞은 산업이라고 확신했다.
우리와 사정이 비슷했던 일본이 전자산업에 뛰어든 지 10년 만에 구미와 겨루는 수준이 되었고, 대만도 도입을 서두르는 모습을 보면서 전자산업은 산업화 시대의 대한민국이 충분히 해볼 만한 분야라는 답을 내렸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전자회사들이 몇몇 있었지만, 외제부품을 도입해 조립하는 초보적인 단계에 불과했다.
숙고를 거친 호암은 1968년 6월 12일 일본 아사히신문과 인터뷰를 통해 전자산업 진출을 선언한다. 부정적인 견해가 다수인 상황에서 그 시작은 초라했다. 일본 산요전자의 협력을 받아 TV를 OEM으로 조립했다. 첫해 매출은 4000만원이었다. 삼성전자의 지난해 매출이 165조원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무려 412만5000분의 1에 불과했다.
하지만 호암은 조립회사를 만들고자 삼성전자를 설립한 게 아니었다. 부지물색 단계부터 그는 당시 세계 선두이던 일본업체들을 목표로 뒀다. 설립과정에서 매탄동에 무려 45만평의 부지를 확보한 것은 산요전기의 도쿄공장 40만평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호암은 “그들보다 한 평이라도 더 크게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삼성전자 설립 초기 호암의 꿈은 전 세계 TV 분야 1등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차곡차곡 한발 앞으로 나아간다. TV를 만들기 위해 브라운관 공장을 세웠고 진공관으로 유명했던 일본의 NEC와 합작해 ‘삼성NEC’를 출범시킨다. 브라운관 부품으로 유리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미국의 코닝과 합작한 ‘삼성코닝’도 설립됐다. 이후 1973년에 삼성전기가 세워지면서 튜너ㆍ콘덴서ㆍ변압기 등의 전기 부품과 유리ㆍ브라운관을 거쳐 세트까지 완성되는 수직 계열화를 이룬다.
성과는 빠르게 나타난다. 1975년 출시한 ‘이코노 TV’가 큰 히트를 친다. 전원을 켜면 예열과정을 거쳐야 했던 기존 제품과 달리 바로 화면이 나오는 이코노 TV는 불티나게 팔린다. 1981년에는 흑백TV 생산 1000만대를 돌파하고, 컬러TV용 IC 개발, 세계 세 번째 TVR 자체 개발 등에 성공하면서 세계적인 기업으로 거듭난다.
그렇게 수원에서 태어난 삼성의 전자사업은 1983년 2월 또 한 번의 ‘대도약’을 단행한다. 호암의 ‘2ㆍ8 도쿄선언’으로 불리는 반도체사업 진출이다. 그의 나이 73세 때다. 범인이었다면 여생을 정리할 시기에 이 회장은 젊은이들조차 머뭇거린 새로운 도전에 나선 것이다.
2ㆍ8 도쿄선언 한 달 후, 삼성그룹의 이름으로 ‘우리는 왜 반도체사업을 해야 하는가’라는 선언문을 발표하지만, 국내에서는 환영보다는 우려와 반대가 더 컸다. 반도체 사업에 대규모 투자를 했다가 실패하면 국민 경제에 영향이 크다는 이유다.
해외에선 아예 무시했다. 일본 미쓰비시연구소는 한국의 작은 내수시장, 취약한 관련 산업, 부족한 사회간접자본, 삼성전자의 열악한 규모, 빈약한 기술 등 5가지 이유를 들어 “삼성의 반도체 사업은 성공할 수 없다”는 보고서를 발간하기도 했다.
하지만 호암의 열정과 탐구열, 끊임없는 연구와 과감한 투자는 삼성의 반도체 사업을 단숨에 세계 수준으로 끌어올린다. 반도체를 만들어본 경험도 없는 107명의 64K D램 개발팀은 ‘하면 된다’는 신념 속에 9개월 만에 기흥공장에서 한국 최초의 64K D램을 개발한다.1년 뒤인 1984년에는 세계 3번째로 집적도 4배를 높인 256K D램을 개발했다. 세계는 놀랐다.
이후 성공스토리는 알려진 대로다. 1992년 마침내 일본을 제치고 세계 최초로 64M D램을 개발한 이후 삼성은 지금까지 메모리 분야에서 견고한 세계 1위를 지켜오고 있다.
호암이 반도체로 눈을 돌리게 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1980년 호암은 당시 일본의 게이단렌의 이나바 히데조(稻葉秀三) 박사로부터 “앞으로는 중후장대(重厚長大)한 산업보다 경박단소(輕薄短小)한 산업에 살 길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뒤 반도체에 시선을 고정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에 앞서 1974년 반도체가 전자산업의 미래이자 핵심임을 정확히 간파한 이건희 당시 동양방송 이사가 사재를 털어 한국반도체를 인수한 것이 사실상 호암이 반도체 사업을 눈여겨 보게 된 시작점이라는 견해도 많다.
호암은 반도체 투자를 “내 평생 가장 잘한 일”이라고 표현했다. 투자를 앞두고 해외 조사를 다녀온 뒤에는 주변사람들에게 “반도체사업은 나의 마지막 사업이자 삼성의 대들보가 될 것”이라고도 확신했다.
1969년만 해도 허허벌판이던 수원은 이제 ‘첨단 전자기업’ 삼성의 두뇌로 탈바꿈했다. 과거 생활가전 공장이 있던 자리에는 내년까지 첨단 전자소재 연구타운이 들어선다. 지금의 수원은 글로벌 삼성의 최대 후원자다. 도시 곳곳에 있는 삼성의 생산 연구시설, 그 사이로 수원 삼성 축구팀의 티셔츠를 입은 젊은이들이 흥겹게 뛰어다닌다. 홍승완 기자/swan@herald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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