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4>바람 부는 길(12)
글 채희문 | 그림 유현숙
자녀의 마음을 가장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사람은 그의 어머니이다. 하지만 이 전제가 사실이라면 그 어머니의 마음을 가장 확실히 알 수 있는 사람이 그 자녀일 수도 있다는 말이 된다. 강유리 선수에게 비키니를 입혀 스키를 태우고자 한다는 말을 듣고 그녀의 속셈을 가장 확실하게 알아차린 사람은 유한솜이었다.
“우리 엄마는 분명히 언니를 이용하자는 거야. 그러니까 언니도 우리 엄마를 이용하세요. 모델료나 왕창 받아내라고요.”
“회장님께 도움이 된다면 까짓 거 비키니 좀 입은들 어때?”
“엄마는 방송국 카메라를 이용하는 데에 일가견이 있어요. 타이밍을 엄청 잘 맞춘다고요. 이번엔 무슨 작전일까? 언니가 스키복을 입은 수많은 사람들 앞에 비키니 차람으로 나타나는 순간, 이미 언니는 유명인사가 되어 있을 테지? 어쩌면 인터넷 클릭 횟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날 지도 몰라요.”
유한솜은 누구보다도 먼저 강유리를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강유리를 꼬이기로 예정되어 있는 사람은 강준호였지만 오히려 유한솜이 그 역할을 대신하는 셈이었다.
“내가 유명인사가 된다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네.”
“누이 좋고, 매부 좋고… 거기에 나도 덩달아 좋아질 수는 없을까요? 언니?”
“우리 한솜이가 덩달아 좋아지는 방법? 그런 방법이 있을까?”
“있지요. 나도 게릴라 레이싱이 벌어지는 날, 언니처럼 비키니 입고 스키를 타는 거예요. 언니 혼자 탈 때보다 훨씬 그림이 좋지 않을까요?”
유한솜은 이미 비키니 쇼를 벌이기로 작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유명해지려는 목적 때문이 아니었다. 제 친오빠, 유호성의 척추를 부러뜨리려고 마음먹은 권일주… 그의 휠체어를 평생 밀어주기로 작심한 당찬 그녀가 한낱 인터넷 클릭 횟수나 높이려고 그런 짓을 할 까닭이 없었다.
“그것 참 멋진 생각이야. 나 홀로 비키니 쇼를 하는 것보다 우리 한솜이와 함께 비키니 쇼를 하면 더 폼 나겠는 걸?”
강유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대답했다. 둘이 함께 벗고 달리면 진심으로 멋질 것이라 여겨졌다. 한솜이도 이미 스무 살을 넘긴 성인이었고 미모 또한 빠지지 않는 편이었으므로.
“나는 A컵, 언니는 C컵! 볼륨에서는 차이가 나지만 함께 어우러지면 오히려 색다른 기분이 느껴지겠죠?”
“아, 그렇구나. 가슴은 조금 작아도, 너는 반듯한 자세가 일품이잖니?”
“고마워요, 언니. 하지만 나도 따라서 비키니를 입는다는 사실은 우리 엄마에게 절대 비밀예요. 만약 엄마가 알게 되면 난 죽은 목숨!”
“알았어. 당일까지 입에 자물쇠 채우고 있을게.”
강유리와 유한솜은 이렇게 약속했다. 겉으로 보기엔 철부지들이 서로 깜짝쇼를 벌이기 위해 손가락을 걸고 약속하는 모습처럼 보이기만 했다. 하지만 유한솜의 마음속엔 시퍼런 칼날이 품어져 있었다. 그 칼날을 마음 깊이 숨긴 채 얼마나 오랫동안을 쓱싹쓱싹 별러왔던가.
왕회장인 엄마는 중계방송을 교묘히 이용하여 전국적으로 무언가 메시지를 전달하려 할 것이 분명했다. 유한솜은 그 순간을 역이용하여 나름대로의 억울한 메시지를 만 천하에 공포하려는 요량이었다. 무슨 메시지냐고? 그야 불을 보듯 뻔한 일. 아버지 유민 회장의 비리로 인하여 반신불수가 된 권일주의 억울함을 생방송으로 전국에 알리려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유한솜은 아버지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낙랑의 공주였다. 원수의 아들, 권도일을 사랑하여 눈이 멀어버린 비운의 공주!
그 뿐인가? 강유리도 나름대로 칼을 갈고 있었다. 더 이상 후견인으로서 돈줄이 되어주지 못하는 신희영 회장은 그녀에겐 이미 낡은 신발이나 다름없었다. 어쩌면 이번 비키니 쇼가 말을 갈아탈 기회가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 실로 무서운 생각이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