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나파르트 공주는 불감증 환자였을까?(La princesse Bonaparte était-elle frigide?)
‘여성들의 자위를 즐기세요’란 책을 쓴다면 웃음거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80년 전쯤 보나파르트 공주는 자신의 끔찍한 괴벽을 고치기 위해 클리토리스 수술을 받아야만 했다.
마리 보나파르트는 나폴레옹 황제의 동생 쪽 후손이자 그리스 및 덴마크 공주로 프로이트의 목숨을 구해준 인물이다. 나치가 권력을 잡고 있던 1938년 프로이트에게 가족과 함께 망명을 떠나라고 권유하면서, 독일인들이 ‘출국세’로 요구하는 금액을 대신 지불했다. 나중에 안전한 상황이 되면서 프로이트는 이 돈을 갚지만, 1939년 9월 23일 턱에 생긴 암 때문에 숨을 거뒀다.
마리 보나파르트는 자신이 존경하던 대가의 업적을 지속적으로 옹호했다. 그녀는 프로이트를 존경할 만한 유일한 정신분석학자로 여겨 여러 해 동안 프로이트의 환자용 침상을 찾아 자신이 겪고 있던 크나큰 불행을 털어놓았다.
꿈이나 무의식에 관해 프로이트가 발전시킨 뛰어난 이론에도 불구하고 마리 보나파르트와 프로이트의 만남은 불행했다고밖에 볼 수 없다. 프로이트는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해 한탄스럽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탄스럽게 생각했다고? 아니, 그것보다 훨씬 더 고약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성인이 되어서도 자위하는 여성은 진정한 여성이 아니다.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아, 오직 삽입을 통해 즐거움을 느끼는 데 어려움을 겪던 당대의 많은 여성들처럼 마리 보나파르트는 성기를 고치는 수술을 여러 번 받았다. 그녀는 성기를 성형수술한 세계 최초의 여성 중 한 명이다. 프로이트의 희생물이 된 여성들 입장에서는 클리토리스형(型) 여성은 곧 불감증 환자를 의미했다.
자신이 비정상적이라 생각한 공주는 삽입에 무감각한 음부를 ‘고치고자’ 노력하며 일생을 보냈다. ‘차가움’을 극복하려면 클리토리스와 질 사이의 거리를 좁혀야 한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 불행한 여성은 1927년부터 1931년까지 메스를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초짜 외과의사들로부터 3차례에 걸쳐 음부를 잘라내는 수술을 받았다.
반면 프로이트는 오직 정신분석을 통해서만 그녀가 ‘회복’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외과용 메스나 환자용 침상 그 어느 것도 마리 보나파르트에게 ‘진정한 여성이 되는 것’을 허락해주지 않았다. 음부의 쾌락을 찾아 그녀는 자신처럼 클리토리스로만 만족을 느끼는 다른 ‘환자들’을 만나러 다니기조차 한다.
1929년 독일 베를린에서 ‘자위로 강박적인 고통을 겪고 있으며, 여러 차례 외과수술을 받았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한’ 한 젊은 여성과 만났다고 그녀는 ‘음핵 절제에 대한 메모’란 책에 적고 있다. 그녀는 음핵을 절단했던 참인데, 이번에도 역시 성공을 거두지 못했던 터였다. 그녀는 즐기기 위해 수술한 부위를 절망적으로 문지르며 지속적으로 애무하고 있었다.
성의학사를 전공한 역사가 이브 페룰(Yves Ferroul)은 ‘의사와 섹슈얼리티’란 책에서 이러한 수술 방식이 18세기부터 시작되었다고 지적한다. 사람들은 소년들의 포피(包皮)와 소녀들의 음순에 금속으로 된 반지를 먼저 끼운다. 신혼여행 이전에 사랑을 나눌 수 없도록 하기 위함이다. 과격한 방식의 정조대인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의 음부 봉쇄가 소녀들로 하여금 자신의 성기를 만지는 것을 저지할 수 없었기에, 그리고 일부 소녀들이 자신의 성기를 봉쇄한 족쇄를 푸는 데 성공했기에 외과의사들은 아주 일찍부터 음핵 절제를 요구했다.
의사들은 “클리토리스가 영원히 흥분시키는 원천으로 밝혀진 이상, 그것의 절제는 합법적인 것이다”라고 거창하게 설명했다. 하지만 그들은 대식가들의 혀를 잘라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1860년대의 영국, 그리고 19세기 말의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20세기 초의 미국에서는 클리토리스 절제가 유행이었다.
일부 의사들은 클리토리스를 달군 불에 태웠고, 다른 사람들은 질산은 봉(棒)으로 음부 전체를 태웠다. 이스탄불에서 건너온 의사이자 도착적 성격의 소유자였던 데므트리우스 잠바코(Demetrius Zambaco)는 두 명의 소녀를 고문하며 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그가 1882년 의학 아카데미에서 발표한 논문은 어떤 항의도 받지 않았다. 거기에는 다음 구절이 등장한다. “나는 음부를 수술하려고 마음먹었습니다. (...) 9월 8일에 이 불쌍한 아이는 음부를 태우지 말라고 빌면서 온 몸을 떨었습니다.
(...) 9월 11일에는 ‘네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으니, 내 약속을 지키면서 네가 틀렸다는 사실을 입증하겠다’라고 이야기해 주었지요. (...) 16일에는 새로운 소훼가 실시되었습니다. 대음순 세 군데와 클리토리스 한 군데를 불로 태웠지요. 불복종을 응징하기 위해 엉덩이와 요부(腰部)도 불로 지졌습니다.”
1920년까지, 그리고 그 이후에도 정신이 나간 부모들은 자기 아이들이 손가락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조잡한 장갑을 손목에 단단히 묶었다. 그런 다음 아이들을 침대에 단단히 묶였다. 기숙사 사감들은 아이들이 시트 위로 팔을 올리고 자는지 늘 감시했다. 밤에 일부 소년소녀들은 미라 꼴이 되는 포대 속에 갇혔다.
낮시간을 위해서는 음부에 가죽을 댄 특수 복장이 강구됐다. 이러한 광기는 2차대전이 끝날 때까지 계속됐다. 1952년에 미국정신의학회가 발간한 ‘간편 정신장애진단 통계 편람(DSM)’의 최초 버전은 자위, 동성애, 오럴섹스, 성적 노마디즘을 병리학적 장애 및 정신질환으로 분류했다.
라 뮈자르딘 출판사(파리 제11구 슈맹베르가 122번지)는 2008년 6월 26일 ‘여성들의 자위를 즐기세요’를 쓴 제인 헌트(Jane Hunt), ‘섹스토이를 즐기세요’를 쓴 오비디(Ovidie), ‘에로틱 바캉스 매뉴얼’을 쓴 마르크 단남(Marc Dannam)의 사인회를 마련했다.
글=아녜스 지아르(佛칼럼니스트),번역=이상빈(문학박사ㆍ불문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