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무실에서 만난 신철식 STX 미래연구원장(부회장)은 예전보다 한결 여유있어 보였다. 전직 경제 관료에서 기업인으로 변신한 지 1년. 사제밥(?)이 좋긴 좋은가 보다. 전 보다 안색이 밝아지고 표정도 생기가 넘친다. 트레이드 마크인 ‘올백 머리’에 회색 정장으로 멋을 낸 신 부회장은, 그의 성격처럼 시야가 시원하게 트인 자신의 집무실에서 반 백년을 지내온 자신의 삶에 대해 담담히, 그러나 때로는 격정적으로 풀어나갔다.
▶불운한 어린시절 “꿈을 꿀 여유가 없었다”
신 부회장에게는 별칭이 많다. ‘공직사회의 자유로운 영혼’, ‘베스트 드레서’, ‘풍운아’ 등등. 풍류와 멋을 알고, 한 군데에 얽메이길 싫어했던 신 부회장에게 모두 썩 잘 어울리는 별칭들이다.
하지만 신 부회장의 인생을 통틀어 그를 가장 짧지만 굵게 규정했던 단어는 바로 ‘고(故) 신현확 전 총리의 아들’이다. 부친이 워낙 거물 관료, 정치인이다 보니 신 부회장은 자신이 관직에서 두각을 나타나기 전까지 신 전 총리의 아들로 살아야만 했다.
그렇다고 부친이 일찍부터 요직에 있었던 덕분에 신 부회장이 유년시절을 ‘온실 안의 화초’로 자랐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신 부회장 스스로도 “유년시절은 사실 행복하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1학년 때 4ㆍ19가 터지면서 당시 자유당에서 관료를 했던 영감(신 전 총리)이 스스로 서대문 형무소로 가셨어요. 그때 분위기로 우리 가족은 모두 영감이 사형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때문에 집안 분위기가 어두울 수 밖에 없었어요.”
이 때 모친인 고(故) 김혜배 여사는 장남인 신 부회장이 약해지는 것을 경계해 모질 정도로 엄격한 가정교육을 했다. 당시 신 부회장의 집에는 ‘매 6종 세트’가 있어 매우 경중에 따라 회초리의 종류도 달라졌다고 한다.
특히 신 전 총리가 형무소로 들어갔을 때, 김 여사는 아들과 함께 마당에서 이불을 깔고 자기도 했다. 당시 형무소는 난방이 제대로 안될 만큼 시설이 열악했는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장남은 아버지의 고충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신 부회장은 모친의 엄격한 가정교육 때문에 근 1년이나 마당에서 칼잠을 자야 했다.
학교에서도 괴롭기는 매한가지였다. 부친이 이승만 정권의 주적으로 꼽히다 보니, 학교에서는 ‘주적의 아들’로 놀림을 받으며 따돌림을 당했다. 그래서 신 부총리는 또래 아이들에게 무시를 당하지 않으려고 공부든 주먹이든 뭐든 지지 않기 위해 열심히 했다고 한다. “유년 시절은 꿈을 꿀 여유가 없을 정도로 치열하게 살았다”고 회상할 정도다.
덕분에 전교에서 성적이나 주먹으로나 신 부회장을 이길 수 있는 동년배는 없었다. 자연히 또래 아이들이 신 부회장을 따르게 되면서 반장이나 회장직을 도맡게 됐다.
▶학창시절 “아버지에게 나를 증명하는 과정”
신 부회장은 예상과 달리 반항적인 학창시절을 보냈다. 학교에서는 그를 모르면 간첩이 될 정도로 유명인사였지만, 유독 집에서는 그의 뛰어남을 인정하지 않았다. 교내 최고의 싸움 짱에 공부도 경기중 수석 입학에 경기고, 서울대 상대 졸업 등 초일류 엘리트 코스만 밟아왔건만 신 전 총리를 비롯해 신 부회장의 집에서는 그가 두각을 드러낼수록 더 많은 것을 요구했다.
“학교에서 전교 1~2등을 다툴 정도로 공부도 잘했고 노래 같은 잡기에도 두각을 보였지만 부친에게 나는 늘 모자란 아들이었습니다. 덕분에 학창시절에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했던 것이 아니라 ‘나는 아버지 생각과 달리 이만큼 능력있는 사람이다’고 증명하는데 더 안간힘을 썼던 것 같습니다.”
집안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고위 공직자인 아버지의 후광 때문에 신 부회장의 활약상이 오히려 부각이 되지 못한 부분도 있다. 신 전 총리의 아들이니 당연히 그 정도는 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식이었다. 이에 신 부회장은 늘 아버지의 크고 깊은 그늘에서 벗어나는 것이 숙제였다. 아버지는 늘 ‘거역과 반역의 대상’이었고, 그러다 보니 반항적인 사춘기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신 부회장은 아버지와 같은 공직의 길을 선택하게 된다. 아버지 뿐 아니라 선대 조부도 대한제국 시절에 공무원을 지내다 보니, 집안 식구들이 모이기만 하면 사적 이익보다 국민이나 정책 등 공익(公益)에 대해 논의하는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이뤄졌던 탓이다. 덕분에 신 부회장은 자신도 모르게 우리나라의 근현대 경제정책을 꿰게 됐다.
“대학 때 진로를 결정해야 할 시기가 왔는데, 사기업 취업을 빼고 평소에 흥미가 없었던 법관을 빼고 나니, 남는 건 공직밖에 없더라구요. 평생 아버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결국 그 자리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버지의 밥상머리 교육이 생각보다 대단했던 모양입니다.(웃음)”
▶공직 사회에 입문 “나답게 일하는 것이 최선. 하지만..”
지난 1979년 공직에 입문한 신 부회장은 공직 사회의 분위기에 매몰되기 보다는 소신을 갖고 ‘나답게(?)’ 일하자고 다짐한다. 덕분에 획일적인 공직 사회에서 신 부회장은 이른바 ‘튀는’ 공무원으로 통했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올백 머리와 콤비 정장(재킷과 바지 색깔이 다른 정장)은 그가 공직에 있을 때 만들어진 스타일이다. 30년 이상이 지난 지금도 공무원들이 시도하기 힘들 정도로 파격적이었다.
공직 사회에서 그의 파격 행보를 대표할 수 있는 사건은 바로 ‘골프장 사건’이다. 1980년대 초반 전두환 대통령은 전국적으로 공무원들에게 ‘골프금지령’을 내렸다. 악화되는 경제상황에서 공무원들이 흥청망청하는 모습을 보여선 안된다는 엄명이었다.
하지만 당시 사무관이었던 신 부회장은 자비로 기자들과 다섯 팀을 꾸려 골프장 회동을 가졌다. 아무리 공무원이라도 자비로 골프를 즐긴다면 국민들에게 부끄러울 게 없다는 소신 때문이었다. 그 후로도 그는 누구와의 어떤 모임에서건 자신의 비용은 직접 계산했다고 한다.
지난 1992년에는 앨범을 제작하기도 했다. 평소 팝 발라드를 즐겨 부른다는 신 부회장은 김현식, 송창식 등 당대 최고의 유명 가수들의 곡을 직접 불러 앨범에 담았다. 상업용으로 만든 앨범이 아니다 보니 100여장 밖에 찍지 않았고, 앨범을 들어본 사람들도 가까운 지인들에 한정됐다. 신 부회장은 지금도 지인들에게 자신을 “웬만한 가수들보다 데뷔가 빠른 원로가수”라고 소개하며 노래 솜씨를 뽐낸다.
덕분에 신 부회장은 당시 출입 기자단이 뽑은 ‘가장 공무원답지 않은 공무원’ ‘가장 놀기 좋아하는 공무원’으로 꼽히기도 했다. 하지만 당사자인 신 부회장은 오히려 덤덤하게 당시를 회상한다. “남들은 나보고 ‘기인’이라고 하지만, 사실 나는 가장 그 시절에 맞게 튀지않게 생활했다고 자부합니다.”
▶공직 생활의 최대 위기는 정치를 하라는 주변의 강요(?)
신 부회장은 튀는 행보 만큼이나 업적도 많다. 그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바로 소비자보호법의 근간을 만든 것이다. ‘소비자의 권익’이라는 용어 자체가 생소하던 1980년대 중반, 신 부회장은 물가정책국 유통소비과에서 관련 법률을 제정하는 작업에 돌입했다.
“소비자보호법은 소비자의 기본 권리를 명시하고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소비자의 피해구제라는 개념을 법에 도입한 법입니다. 당시 국민들로부터 많은 호응을 받아 상당히 보람을 느꼈습니다.”
신 부회장은 또 지금의 올레TV를 탄생시킨 방송통신융합법도 시장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는 차원에서 의미있는 성과였다고 소개했다. 당시 복지부 장관의 반대로 부결되기는 했지만 국민연금 개혁법도 신 부회장의 성과 중 하나로 꼽았다.
승승장구하던 그의 공직 생활에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신 부회장의 위기는 공교롭게도 선거 때 마다 찾아왔다.
그는 지난 1988년 총선 이후로 선거 때 마다 정치권에서 러브콜을 받았다. 아버지인 신 전 총리가 TK(대구ㆍ경북) 지방의 대부이다 보니, 아들인 신 부회장도 의례 정치를 할 것이라는 세간의 시각 때문이었다.
“TK의 대부였던 아버지와 고위 공무원이라는 저의 간판이 상당히 매력적이었던 모양입니다. 선거 때 마다 내가 언제 공직을 그만 둘 것인지를 놓고 내기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죠.”
실제로 선거 때만 되면 신 부회장이 그만둔다는 소문이 마치 사실인 듯 돌아다녔다. 주변의 관심과 눈초리가 부담스러울 정도였다고 한다.
사실 신 부회장 입장에서는 마음만 먹으면 정치를 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부친이 3선을 했던 지역구가 있었기 때문에 그 지역구를 물려받으면 국회의원 쯤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신 부회장은 정치판에 나서는 것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이다.
“영감의 공직생활에는 상당한 부침이 있었는데, 그 배경에는 정치권의 음모와 술수, 계략, 전략적 판단이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그런 정치판을 보면서 정치는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혹자는 STX 부회장직에서 물러나면 정치에 나가는 것이 아니냐는 시각이 있는데 절대 정치를 할 생각이 없습니다.”
▶강덕수 STX 회장과의 인연, 관에서 민으로
신 부회장이 지난해 STX라는 기업으로 복귀했을 때 주변에서는 의외라는 반응이 많았다. 보통 전직 경제관료들은 억대 연봉을 받고 로펌의 고문직으로 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박봉으로 고생했던 공직 경력을 보상받으려는 심리가 큰 탓이리라. 하지만 신 부회장은 과감히 로펌의 러브콜을 포기했다.
“퇴직 후 일자리를 주겠다고 먼저 연락이 온 것은 국내에서 내로라 하는 2곳의 로펌이었습니다. 모두 고액 연봉의 고문직이었지만, 공직에 있는 후배들에게 부탁하며 사는 로비스트 역할이라 제 적성에 맞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퇴직 후 아버지의 이름을 딴 우호문화재단에서 고문직을 맡아 생활하던 어느 날, 신 부회장에게 강덕수 STX 회장이 찾아온다. 강 회장과는 동향 출신으로, 집안끼리 잘 아는 사이라 가끔 만나 식사를 하는 친분을 갖고 있었다. 늘 유쾌하던 강 회장이 그날 유독 진지하게 말을 꺼냈다.
“강 회장이 좀 있으면 STX가 설립 10주년이 되는데, 앞으로 새로운 10년을 구상하는 큰 밑그림을 만들 사람이 필요하다고 진지하게 말하더라구요. 민간에서는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없으니 그 역할을 꼭 제가 해야 한다구요. 로펌 고문처럼 뒷방 늙은이로 있는 것보다 제 주전공(기획ㆍ예산업무)을 살릴 수 있는 이 일이 매력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이에 신 부회장은 강 회장의 제안을 받아들여 공직자 윤리법상 취업이 제한된 2년의 기한이 지나자 마자 2010년 1월 STX그룹 미래전략 위원회 위원장으로 합류하게 된다.
신 부회장이 STX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로 10년 후 STX의 비전을 담은 ‘비전 2020’을 만드는 것이었다. 기획이나 예산 업무에 자신있는 신 부회장이었지만, STX의 주력 사업인 조선, 중공업 부문에 대해서는 문외한(門外漢)이었다. 이에 조선과 중공업 부문에 대해 기초적인 것부터 공부를 해야 했다.
“산업의 특성상 STX는 기술자들이 참 많습니다. 문과 출신인 제가 기술자들이랑 얘기를 하려고 하다보니 어려움이 상당했죠. 저와 얘기했던 기술자들은 내 앞에서는 고개를 끄덕였겠지만 뒤돌아 서서 ‘니가 뭘 알아’라며 무시한 사람도 많았을 겁니다.”
이같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신 부회장은 ‘비전 2020’을 완성했고, 지난 4월 중국 다롄에서 STX 임직원들 및 내외신 언론 앞에서 비전 2020을 발표했다.
▶STX 미래연구원에서 그룹의 미래를 이야기하다
신 부회장은 비전 2020을 완성한 후 STX 미래연구원에서 대표이사를 맡게 됐다. 직함도 비상근에서 상근 부회장으로 바뀌었다. 미래연구원이 그룹의 10년 후 사업 전략을 짜는 그룹의 싱크탱크인 만큼 그가 하는 일에 세간의 관심이 높아졌다.
그는 STX가 지금과 같은 성장세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국제 지역분업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조선은 지난 1970년대 한국에 들어온 후 한국경제를 지탱해 온 주요 산업입니다. 하지만 컨테이너·벌크선 등 중저가 선박은 이미 중국 조선소들이 턱밑까지 쫓아왔습니다. 이런 시장 상황에서 STX가 살길은 LNG와 같은 고부가가치 선을 만드는 것입니다”
신 부회장은 이를 위해 STX가 중국 다롄(大連)에 중저가 선박 건조를 위한 조선소를 건설했고, 한국 진해조선소에는 LNG선박을, STX유럽은 초고부가치 크루즈선을 건조하는 등 교통정리를 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STX는 미래 먹을거리에 대한 선행 투자가 필요하다는 말도 했다. 이는 최근 그룹이 하이닉스 인수전에 뛰어든 맥락과 같다.
▶“어느 분야에 있든 떳떳하게 사는 것이 최고”
신 부회장이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바로 ‘떳떳함’이다. 구설수 없이 30년 이상 지속해 온 공직생활을 깔끔하게 마무리할 수 있었고, 민간 기업에 와서 당당하게 일할 수 있는 것도 바로 떳떳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영감이 서대문 형무소에 가기 전 마지막으로 나를 앉혀놓고 당부했던 말이 바로 “떳떳하게 살아라”였습니다. 남의 눈치를 볼 것 없이 떳떳하게 산다면 가장 나답고 보람차게 살 수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신 부회장은 공직 선배로서 최근 비리에 연루된 공무원 후배들을 볼 때 매우 안타깝다. 정책 입안을 하다보면 산업이나 업계 쪽과 접촉할 일이 많고, 당연히 접대나 향응을 받을 기회도 많아진다. 만약 이런 분위기를 당연히 생각하면서 접대나 향응을 받기 시작하면 그 결과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된다
“국민들은 공직사회에 더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는데, 사실 현직에 있을 때는 이런 사실을 모릅니다. 저도 민간 기업에 나와 보니까 이제야 알겠더라구요. 하지만 사회 통념보다 항상 한발 앞서 민감하게 생각한다면 이런 구설수는 충분히 피할 수 있습니다.”
<신소연 기자@shinso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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