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날개에 숨긴 칼 (30) 글 채희문 / 그림 유현숙
고층건물에서 엘리베이터가 느닷없이 고장 났을 경우를 가정해본 적이 있는지? 시절이 하수상하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공상에 한 번쯤은 빠져본 적이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사실 외국의 어느 기관에서는 일부러 그런 상황을 조작한 채 하루 밤 낮 동안 갇힌 사람들의 심리를 연구한 적도 있다고 한다.
한 술 더 떠서, 천재지변 등으로 고층건물이 무너져 어딘가에 갇혔을 때 하필 마음에 꼭 드는 젊은 이성과 단둘이 남게 되길 바란 적은 없었는지? 만약에 있었다면 얼마동안이나 둘이 갇혀있게 되길 원했는지? 하루? 이틀? 아니면 일주일 정도?
모르긴 해도 대부분의 남자들은 일주일 정도 쯤 갇혀있길 원했을 것이라 믿는다. 그 일주일 동안 두려움에 떠는 미모의 여인을 위로도 하고, 용기를 불러일으켜 주고, 희망을 잃지 않도록 해주다가 극적으로 구조되어… 이래야 정답일 텐데, 대부분의 놈자들은 두려움에 떠는 미모의 여인을… 위로를 빙자하여 끌어안게 되는 공상부터 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인데 한 번 하고나 죽을까요?’ 하는 데까지 진도가 나갔다면… 비록 공상이라고는 하지만, 에라! 이 떡을 할 놈 같으니!
“무섭고 걱정되고 그래요, 오빠. 아무래도 이 섬에 우리 말고 또 다른 누군가가 있는 것 같아요.”
김지선은 몸을 와들와들 떨면서 유호성의 팔에 매달렸다. 그러나 이심전심! 유호성도 한편으로 그런 공포에 시달리고 있었다. 만약에 누군가가 있다면? 으이그! 생각하기도 싫었다. 무엇보다도 옷을 홀랑 벗고 있다는 것이 큰 문제였다.
만약 대중목욕탕에 깡패 한 명이 옷을 입은 채로 침입했다면 얼마나 가관일까? 옷을 홀랑 벗은 사람들 중에 태권도 5단, 유도 3단 짜리 유단자가 있다고 해도 선뜻 나서서 그를 제압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방울을 달랑거리며 2단 옆차기를 하기도 좀 그렇고, 미끄러운 바닥에 물 묻은 맨발로 나서서 밧다리후리기를 하기도 좀 껄쩍지근하다는 말이다.
“걱정 말아요, 우리 말고 또 누가 있겠어?”
유호성은 고장 난 재봉틀 처럼 덜덜 떨리는 손으로 더욱 더 덜덜 떨고 있는 김지선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사실 그 외에는 다른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주린 배를 참아가며, 타는 갈증을 참아가며… 그렇게 끌어안고 있을 수밖에. 이 와중에 ‘한 번 더 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았다.
‘철썩 철썩 꼬로록! 철썩 철썩 꼬로록!’
그들은 밤새 이런 소리를 들으며 뜬 눈으로 새워야 했다. 밤이 깊을수록 파도소리는 더욱 선명하게 들려왔고, 마치 파도소리 뒤에 따라오는 후렴처럼 배곯는 소리가 꼬로록! 이어지곤 했던 것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니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않은 김지선의 나신인들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했다. 물론 방울 하나 달고 쪼그려 앉아있는 유호성의 나신에서도 그녀가 아무런 감동을 받을 수 없음 또한 사실이었다.
“오빠, 저기 노~란 하늘 밑으로 보이는 게 뭐지요?”
김지선이 손가락으로 바다를 가리켰고, 유호성이 게슴츠레해진 눈을 비벼가며 그쪽을 바라보았다. 종일토록 굶었으니 하늘이 노랗게 보였던 것인데 흔들흔들, 비틀비틀 다가오는 무언가가 분명히 눈에 보였던 것이다.
“배다, 쪽배! 드디어 우리를 데리러 오는 거라고!”
유호성이 환호성을 지르며 벌떡 일어섰다. 그러나 그의 환호성에 퍼뜩 정신을 차린 김지선은 누가 볼세라 뒤로 돌아서서 산 속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어딜 가는 거야? 배가 온다니까?”
“알몸이잖아요!”
“그렇군, 자기는 일단 숨어있어 봐.”
유호성은 미리 준비해 놓은 술통 뚜껑으로 간신히 사타구니만을 가린 채로 훠어이 훠이 손을 저어 배를 맞아들였다. 그러나 이건 또 어인 일인지… 할아버지가 노를 젓는 쪽배인줄 알았는데 막상 선착장에 닿은 배는 수십 명의 유람선을 태운 동력선이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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