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 인물편. 잔 에뷔테른]
병약한 귀공자 구한 천사같은 여인
영원한 사랑 결국 빛 보지 못한 채
영광을 눈앞에 두고 세상과 등지다
편집자 주
후암동 미술관은 무한한 디지털 공간에 걸맞은 방대한 내용과 자료의 초장편 미술 스토리텔링 연재물 원조 맛집입니다. 기사는 여러 참고 문헌 기반에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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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큼 괴로움이 컸기에
한 걸음, 또 한 걸음….
잔 에뷔테른은 천천히 발을 뗐다. 살얼음 밟듯 마룻바닥 위를 걸었다. 부모와 오빠는 각자 방에서 잠든 듯했다. 1월의 밤은 차가웠다. 냉기가 금세 얇은 옷 틈으로 파고들었다. 바닥에 스며든 바람도 맨발을 타고 올라왔다. 에뷔테른은 이런 와중에도 고행자가 된 양, 앞으로 살살 나아가기만 했다.
그녀의 풍성한 밤색 머리카락은 이리저리 뭉쳐있었다.
통통한 아몬드 모양의 눈매 또한 반쯤 감겨있었다. 그녀의 우아했던 어깨선도, 섬세했던 손가락도…. 에뷔테른의 마지막 연인,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그 남자가 사랑했던 그녀의 모든 자랑거리는 하룻밤 만에 잔뜩 쪼그라들었다.
에뷔테른은 이제 고작 스물두 살이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아무도 그녀를 그 나이로 보지 않을 터였다. 정 많은 집시가 있다면,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기에 폭삭 늙었느냐며 함께 울어줄 모습이었다.
에뷔테른은 그 쪼그라든 손가락으로 베란다 문을 열었다.
6층 높이의 이곳은 파리 특유의 어수선한 언덕, 헝클어진 골목 사이사이를 비추고 있었다.
“우리는, 정말 한 치의 틈도 없이 사랑을 했어.”
순간, 에뷔테른은 초주검이 된 모딜리아니가 입버릇처럼 한 말을 다시 들은 듯했다. 서둘러 난간 끝을 잡았다. 늘 그랬듯 그를 언덕길에서, 혹은 골목 틈에서 볼 수 있을 듯했다. 담배 연기를 길게 뿜으며, 끝끝내 버리지도 않은 그놈의 외투를 걸친 채 손을 흔들 것 같았다. 그 사람을 한 번만이라도 더 볼 수 있다면 당장 맨발로라도 뛰어나갈 터였다. 꿈에서나 실컷 했던 말을 쏟아낼 생각이었다.
내가 내 부모님을 어떻게든 설득하겠으니, 우리… 이제라도 다시 돌아가자고. 어디로? 우리만의 따뜻한 공간으로. 아무리 둘러봐도 그는 없었다. 사랑 타령을 하는 모딜리아니의 목소리는 역시나 환청에 불과했다.
에뷔테른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새하얀 입김이 피어나더니, 하늘 위로 곧장 사라졌다.
전날, 에뷔테른은 모딜리아니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인은 결핵성 뇌막염이었다. 그녀는 아직도 그의 죽음을 믿을 수 없었다. 물론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충분히 받아들일 수도 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약을 하고, 술을 마시고, 때로는 약과 술을 함께 한 채 담벼락에 기대 잠들던 이였다. 괴롭고, 슬프고, 아프다며 매일 밤 피가래를 토해내던 사내였다. 친구들 틈에선 호탕한 웃음만, 그녀 품에서는 처연한 눈물만 흘리던 나약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이 따위 겨울 입김처럼 허무하게 가면 안 되는 것 아닌가. 에뷔테른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품은 빛나는 재능은, 그 독창성과 무한한 잠재력은 생명의 불씨를 지키지 않고 뭘 했다는 말인가. 에뷔테른은 신도, 세상도, 운명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바람이 불었다.
그곳은 여기보다 추울 텐데. 에뷔테른은 혼잣말을 했다. 챙겨줄 사람도, 품어줄 사람도 없을 텐데. 에뷔테른은 이제야 모딜리아니의 죽음을 체감할 수 있었다. 마취가 풀린 듯 통증이 갑작스럽게 밀려왔다.
바람이 또 한 번 훅 불었다. 그곳에선 병간호를 할 사람도, 모델 일을 해줄 사람도 없을 텐데. 이곳에 있는 자신 또한, 그 버러지 같은 연인 없이는 아픔을 이겨낼 자신이 없었다. 그저 아득했다. 에뷔테른은 난간에 올랐다. 잊었던 약속을 떠올린 양 망설임은 없었다. 서서히, 천천히 힘을 뺐다. 그날 밤, 그렇게 한 우주가 또 저물고 있었다.
사랑의 시작
에뷔테른은 당시로부터 3년 전인 1917년, 파리 몽마르트 언덕 일대 찻집에서 모딜리아니와 처음 마주했다.
그녀는 열아홉의 미술학도, 그는 서른셋의 사실상 무명 예술가였다. 아, 그때 그 가여운 사람이 왔구나. 에뷔테른은 모딜리아니를 본 순간 이런 생각을 했다.
사실, 그때도 에뷔테른은 모딜리아니가 낯설지 않았다. 그녀는 당시 몽파르나스에 있는 아카데미 콜라로시에서 예술을 배웠다. 눈앞 이 남자는 어둑한 밤이면 거리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그는 어김없이 거적때기 같은 외투를 걸친 채 술주정을 하고 있었다. 틀림없이 바지를 질질 끌며 친구들과 병나발을 불고 있었다. 비틀대며 웃고, 휘청이며 노래를 흥얼대고….
저 사람은 무엇 때문에 저토록 힘들어하고 있을까. 그녀에게 그는 이런 궁금증을 갖게끔 만드는 사람이었다.
물론, 에뷔테른은 모딜리아니의 외모에도 관심을 가지기는 했다.
모딜리아니는 타고난 미남이었다. 별명 또한 파리의 귀공자였다. 짙은 눈썹, 깊은 눈, 단단한 턱과 우수에 찬 분위기 등 지나치면 한 번씩은 돌아보게 되는 모습이었다.
다만, 에뷔테른에게 모딜리아니의 외모가 결정적인 호감 지점까지는 아니었던 게 확실하다. 그 시절 파리는 모딜리아니 말고도 온갖 선남선녀가 모이는 환락의 도시였으니.
그리고, 모딜리아니 또한 그날 그 순간 에뷔테른에게 빠져들고 있었다.
에뷔테른은 무언가 달랐다. 열아홉의 소녀는 그가 겪고 떠나보낸 숱한 애인들에게는 없는 게 있었다. 순수함이었다. 코코넛 알맹이처럼 새하얀 마음이었다.
그간 내 과거를 물어본 여자가 몇이나 있었는가. 내가 왜 종종 피를 토하고, 왜 늘 염세주의에 젖어있는지 궁금해한 여인은 또 얼마나 있었는가. 지금껏 모딜리아니의 불장난 상대가 된 이 대부분은 그를 찰나의 액세서리로 썼을 뿐이었다. 물론 모딜리아니 또한 그녀들을 그렇게 대했지만.
하지만 에뷔테른은 그러지 않았다.
에뷔테른은 모딜리아니의 모든 이야기를 상자에 꾹꾹 눌러 담듯 가슴에 담고 있었다. 그가 어릴 적부터 결핵과 늑막염 등 온갖 병치레를 겪고 사선을 헤맸다는 말에는 눈시울을 붉혔다. 그나마 배운 재주가 예술이라 예술가로 살지만, 이 또한 신통치 않아 친구들이 자신을 ‘모디(Maudit·저주받은 사람)’라고 부른다는 얘기에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둘은 어느새 손을 잡고 있었다. 사랑의 시작이었다. 때때로 사랑은 동정과 연민에서, 낯섦과 신비로움의 대지에서 뿌리를 내리는 법이다.
“잔. 그 비쩍 마른 사람과는 만나지 않는 게 좋겠다. 소문을 들어보니 답도 없는 가난뱅이라는 말이 파다하구나.”
“아버지, 어머니. 그 사람은 그저 상처가 많은 사람일 뿐이에요. 앞으로 충분히 잘 될 수 있는 사람이에요.”
“그따위 기괴한 예술품을 갖고? 동생아. 신분이든, 종교든, 그 남자가 우리 집안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잖니.”
“오빠. 그가 조금 불행한 건 사실이야. 하지만 분명 슬픔을 딛고 일어설 사람이야.”
“좋아. 만에 하나 그렇게 된다고 칠게. 그렇다면 너는? 지금껏 잘 다져온 네 미래는?”
내 미래는…. 에뷔테른은 잠깐 말을 멈췄다.
그간 에뷔테른에게 놓인 길은 비교적 순탄했다. 그녀에게는 타고난 예술 감각이 있었다. 특히나 소묘에 소질을 보였다. 열세 살 무렵에 그린 그림이 책의 정식 삽화로 실릴 정도였다. 대형 백화점에서 일한 아버지는 그런 딸의 능력을 꽃피워줄 만큼의 돈도, 능력도 있었다. 그래서 그 무렵 에뷔테른은 여자의 몸으로 예술도 하고, 예술 학교도 다닐 수 있는 것이었다. 내 미래는…. 에뷔테른이 선언하듯 말했다. “앞으로는 우리의 미래라고 해주세요. 제가 이 집에서 나가겠어요.”
에뷔테른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녀가 짐을 챙겨 간 곳은 모딜리아니의 눅눅한 작업실이었다. “잔. 당신이 이 시간에 왜?” 잠들었던 모딜리아니가 스르륵 일어섰다. 그사이 악몽이라도 꿨는지, 두 볼이 푹 젖어있었다. “내가 왔어요.” 에뷔테른은 그런 모딜리아니의 뺨을 어루만져줬다.
잿더미가 된 꿈
기괴한 그림.
오빠의 표현이 거슬리긴 했지만, 틀린 말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모딜리아니의 그림은 실제로 기괴하고, 다소 음란하기까지 했다. 여러 사회적 논란과 문제도 부를 정도였다.
가령 모딜리아니는 잔과 만난 그해 말, 라피트 거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 수 있었다. 몇 안 되는 지인이 힘을 써준 결과였다. 그러나 이는 그의 최초이자 최후의 행사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모딜리아니는 잘하고 싶었다. 에뷔테른을 위해서라도 잘 돼야만 했다.
이날 머리카락에 기름을 잔뜩 바른 모딜리아니는 부유한 신사 같았다. 며칠간 술을 줄인 덕인지 혈색도 좋아보였다. 결과만 좋으면 그림 한 점을 고작 10프랑(당시 약 2달러)에 팔아야 했던, 그런 비루한 처지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어쩌면 쌀쌀맞은 에뷔테른의 가족 또한 자신을 인정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야심은 경찰관의 난입으로 잿더미가 되고 만다.
“당신이 이 그림을 그렸습니까.”
“네. 맞습니다.”
예고 없이 문을 밀고 들어온 경찰관은 모딜리아니에게 다짜고짜 물었다. “저 이상한 그림…. 또, 저 노골적인 누드화도 직접?” “아, 그렇지요. 맞습니다만.” 경찰관의 표정에는 불쾌함이 잔뜩 서려있었다. 쇼윈도에 걸린 누드화 두 점을 놓고 추악한 걸 보는 듯, 불결한 걸 대하는 듯 거리를 뒀다.
“저 따위 그림을 전시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네 미풍양속이 우스워서?” “아니, 그게….” “전시를 그만하세요.” 경찰관의 통보였다. 그게 다였다. 모딜리아니는 결국 생애 첫 전시회를 접어야 했다. 그가 얻은 건 저질, 변태, 정신이상자와 같은 악명이었다. 그게 끝이었다.
에뷔테른 또한 이날 애써 쌓은 탑이 무너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에뷔테른은 모딜리아니가 당장의 주류와는 동떨어진 그림을 그리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가 왜 일그러진 인물과 누드화에 집착하는지, 왜 우아한 인물과 고급스러운 옷 등 소품을 ‘예쁘게’ 표현하는 데 도통 관심이 없는지를 이해하고 있었다.
모딜리아니에게는 확고한 예술 철학이 있었다. 그것은 영혼에 대한 연구였다.
모딜리아니는 인간의 원초적 모습을 그리고자 했다. 겉면 말고 내면에 천착하는 데 집중하고 싶었다. 그렇게 해 교과서적 아름다움 따위를 배제한 그림을 내놓고 싶었다. 즉, 보고 느낀 그대로를 빚어 만든 아프리카 가면 같은 작품을 구현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래서 얼굴과 목을 늘이고, 어깨를 가라앉히고, 벌거벗은 채 아무렇게나 누운 모습의 그림을 그리곤 한 것이었다. 짙은 화장과 고급스러운 옷, 정형화된 포즈는 겉보기에 예쁘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현실을 등진 채 예쁜 척만 하는 위선에 가깝다는 생각이었다.
기계적으로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릴 뿐인 기술자가 되지 말고, 단 한 명의 예술가가 되어라.
이는 근대회화의 창시자 폴 세잔의 가르침이었다. 그런 점에서 모딜리아니는 이미 죽고 떠난 세잔의 가장 충실한 제자였다. “나는 무의식, 즉 본능이라는 신비를 알고 싶을 뿐…. 내가 추구하는 건 현실도, 비현실도 아니야.” 모딜리아니는 이런 말을 자주 했다.
“그래요. 그런 생각인 건 잘 알겠어요. 그런데, 당신이 그리는 제 얼굴에 왜 눈동자는 없지요?”
언젠가 에뷔테른은 모딜리아니의 꺼끌한 수염에 얼굴을 대고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그러면 모딜리아니는 이런 말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당신의 영혼을 다 알고 난 후에 눈동자를 그릴거야.” 그만큼 모딜리아니는 그림에 신중하고, 예술에 진지했다.
신의 옆자리에 앉은 성모
하지만 세상은 모딜리아니의 신중함을, 진지함을 이해하지 못했다.
첫 전시회를 허무하게 망친 모딜리아니는 다시 몸을 막 굴렸다. 에뷔테른은 모딜리아니가 집에 들어오지 않을 때면 뤽상부르 공원이나, 몽마르트 언덕의 골목길을 구석구석 훑었다. 그녀는 좁고 습한 어딘가에 찌그러진 그를 보면 웃지도, 울지도 않았다. 그저 눈높이에 맞춰 쪼그려앉았다. 술 냄새가 폴폴 나는 몸을 잡아당겨 꼭 끌어안았다.
그 또한 아프고 싶어서 아픈 게 아닐 것이다. 가난하고 싶어서 가난한 것 또한 아닐 것이다. 이를 알기에, 에뷔테른이 그에게 하는 말은 늘 같았다. “괜찮아요. 다 괜찮아질 거예요.”
에뷔테른은 부디 그 재능을 버리지 말고 그림만은 이어가달라고 부탁했다. 세상이 언젠가는 당신을 알아줄 것이라고 설득했다. 모딜리아니는 그제야 아이처럼 꺽꺽 울곤 했다.
“에뷔테른은 순수하고, 사랑스러웠고, 긴 머리를 땋아 내린 가냘픈 여인이었다. 때때로는 신의 옆자리에 앉은 성모 같았다.”
그런 에뷔테른을 본 지인의 말이었다. “천사 같은 에뷔테른이 그를 구해내고 있다.” 이건 모딜리아니 친구들의 말이었다. 모든 걸 잃어가는 와중에도 에뷔테른만큼은 잃기 싫었던 걸까. 모딜리아니는 에뷔테른의 그 말만큼은 지켰다. 그는 하루에 백 장 넘는 스케치를 그리기도 했다. 여전히, 여전히 잘 팔리지 않았지만.
피어난 희망의 꽃
에뷔테른은 다시 희망을 품었다. 그것은 1918년, 남부지방 니스에서 피어난 꽃이었다.
에뷔테른과 모딜리아니는 이곳에서 1년가량 시간을 보냈다. 모딜리아니를 위한 요양이었다. 술과 약을 마구 털어넣은 모딜리아니의 건강은 최악에 이르고 있었다. 눈의 충혈은 깊게 잠들어도 옅어지지 않았다. 잔기침은 또다시 가래가 들끓는 기침으로 변했다. 양껏 챙겨 먹여도 체중은 빠지기만 했다. 그것은… 잠들어있던 결핵의 증상이었다. 에뷔테른은 니스의 온화한 햇빛이 그의 질병도, 불안감과 초조함도 보듬어주기를 바랐다.
에뷔테른은 그해 딸도 낳았다.
조막만한 아이에게 지오바나(나중에는 어머니의 이름 그대로 ‘잔’이라고도 불림)라는 이름을 붙였다. 여기에는 ‘은혜롭다’는 뜻도 담겨있었다. 모딜리아니도 그 은혜에 힘입어 기운을 차리는 듯했다. 그는 몸이 괜찮을 땐 관광객을 상대로 그림을 파는 일도 했다. 여전히 제값을 받지는 못했지만, 상황은 조금씩 나아질 것 같았다. 언젠가부터 눈동자가 또렷하게 그려진 에뷔테른의 초상화가 하나둘 생기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에뷔테른은 모딜리아니의 두 번째 아이를 뱄다. 먹을 입이 늘어난 데 이어, 얼마 뒤 그 입이 또 하나 늘어날 터였다. 당장 모딜리아니가 받아오는 돈으로는 두 사람이 삶을 꾸리기에도 여전히 부족했다. 날이 추워지고 있었다. 그래서 에뷔테른은 결국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부모에게.
1919년, 공기가 부쩍 차가워진 어느 날. 에뷔테른은 부모가 있는 파리의 아파트를 찾았다.
부모는 문을 열었다. 다만, 문을 열어준 상대는 딸 에뷔테른과 손녀 지오바나뿐이었다. 모딜리아니는 관심 밖이었다. 부모에게 모딜리아니는 여전히 원망스러운 존재였다. 예쁜 딸을 홀린, 순진한 딸을 아프게 한, 재능있는 딸을 힘들게 한 철없는 보헤미안일 뿐이었다.
모딜리아니는 눅눅한 방으로 다시 왔다. 이제 그 방에는 천사도, 은혜도 없다는 게 평소와는 다른 부분이었다. 모딜리아니는 때때로 에뷔테른이 사무치게 그리워질 때면 낮이든, 밤이든 무작정 외투를 입었다. 울면서 돌아왔던 길을 울면서 재차 걸어갔다. 에뷔테른이 있는 아파트가 보였다. 그는 언덕길에서, 골목 틈에서 우두커니 서 있곤 했다.
그러면 에뷔테른은 틀림없이 창가로 다가왔다. 그가 손을 흔들면 그녀 또한 손을 흔들었다. 몸이 나아지면, 이 겨울만 끝나면, 그림이 조금만 더 비싼 값을 받으면…. 에뷔테른과 모딜리아니 모두 희망이 있었다. 곧 다시 같은 방에서 잠을 잘 수 있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올겨울은 유독 매서웠다.
모딜리아니는 냉기 가득한 방에서 웅크린 채 누웠다. 태생부터 약한, 방탕한 생활 탓에 더 약해진 그의 몸은 착실하게 붕괴하고 있었다. 1920년, 1월. 모딜리아니는 결국 일어나질 못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쯤 에뷔테른은 모딜리아니의 병간호를 위해 잠시 그의 곁에 있었다고 한다. 쥐 죽은 듯 인기척이 없는 걸 이상하게 여긴 이웃이 문을 열었고, 울고 있는 에뷔테른과 그런 그녀 품에 힘없이 안겨있는 모딜리아니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이에 에뷔테른은 다시 부모의 집으로, 모딜리아니는 곧장 자선병원으로 옮겨졌다는 이야기다. 그날 이후 에뷔테른과 모딜리아니는 다시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모딜리아니는 끝내 저주받은 운명을 이기지 못했다. 서른여섯 살 나이였다.
끝내 짓밟히고 만 꽃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었다.
세잔과 빈센트 반 고흐, 파블로 피카소와 앙리 마티스 등 그 시대의 천재들은 예술계에 거듭 못을 때려 박았다. 단단한 바위 위로 어느덧 균열이 일었다. 그러더니 어느 날 예고도 없이 확 쪼개졌다. 그 안에선 기다렸다는 듯 구조의 해방, 감정의 폭발 따위 구호가 울려퍼졌다. 시대가 드디어 현대미술을 받아들일 준비를 마친 것이었다. 세상은 그제야 모딜리아니를 재평가하기 시작했다. 그의 그림이 독보적인 개성, 압도적인 밀도를 지녔다는 칭송이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때는 늦었다.
모딜리아니의 장례식은 1920년 1월27일에 치러졌다.
그의 유해는 페르 라셰즈 묘지에 묻혔다. 그의 진가를 뒤늦게 알아본 많은 이가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거기에 에뷔테른은 없었다. 에뷔테른은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모딜리아니가 죽은 다음 날, 아파트에서 스스로 극단적 선택을 했기 때문이었다. 에뷔테른의 부모는 그녀를 파리 교외에 따로 묻었다. 에뷔테른의 유해가 모딜리아니의 묘지와 합장된 건 10년이 지난 후 일이었다.
“드디어 영광이 쌓이려고 했을 때, 죽음이 그를 빼앗아갔다.”
모딜리아니의 묘석에는 이런 글이 쓰였다.
“모든 것을 다 바친 모딜리아니의 헌신적인 반려자였다.”
그와 함께 묻히게 된 에뷔테른에 대해선 이러한 글이 새겨졌다. 모딜리아니와 가까웠던 시인 앙드레 살몽은 이런 말을 남겼다. “(…)생 메다르 교구(敎區)의 마리아상을 닮은 모딜리아니의 죽은 아내여. 편히 잠들라. 흙에 덮여가는 그 새하얀 은둔처에서.”
<참고자료>
Modigliani, Duchene, Delphine, Koenemann
모딜리아니: 고독한 영혼의 초상, 마틸데 바티스티니, 마로니에북스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도리스 크리스토프, 마로니에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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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오면 왠지 마음이 쓰여 검색해보는 강원도의 한 마을이 있어요. 그곳의 군장병분들, 오늘도 파이팅입니다. 마음 깊이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