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강승연 기자] #. 냉전이 최고조로 치달았던 1962년, 소련의 흐루쇼프 정권이 중거리 핵미사일 42기를 쿠바에 전격 배치했다. 미국 본토가 소련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온 절체절명의 상황.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핵미사일을 철거하지 않으면 전면전쟁도 불사하겠다고 경고장을 날렸다. 세계를 핵전쟁 일보 직전까지 몰고 간 ‘쿠바 미사일 위기’의 줄거리다.
우크라이나 사태를 둘러싸고 서방이 러시아에 대한 3차 제재를 단행한 데 맞서 러시아가 ‘냉전 동지 껴안기’에 나서고 있다. 미국과 유럽으로의 서진(西進)이 좌절되자, 방향을 틀어 쿠바와 아시아로 동진(東進)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러시아와 서방 간 ‘신(新) 냉전’ 우려가 고조되는 가운데, 미국의 앞마당인 쿠바와 러시아의 협력강화 움직임은 미묘한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라브로프, 쿠바 방문=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28일(현지시간) 이틀 간의 일정으로 쿠바를 방문했다.
라브로프 장관은 수도 아바나에서 라울 카스트로 국가평의회 의장과 브루노 로드리게스 외무장관을 만나 양국 간 협력 증진을 논의하고 지역ㆍ국제 현안 해결 방안을 협의할 예정이다.
이에 대해 러시아 외무부는 “쿠바는 지난달 27일 유엔에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크림자치공화국의 합병을 무효화하는 내용의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결의안’이 통과됐을 때 반대표를 던졌다”고 밝혀 이번 방문 기간 동안 우크라이나 문제가 집중 논의될 것임을 시사했다.
쿠바와 러시아는 1991년 소련이 붕괴되기 직전까지 30여년의 냉전 기간 동안 밀접한 동맹 관계를 유지해왔다. 냉전 종식 이후 소원했던 관계는 2009년 양국이 전략적 협력 동반자 양해각서를 체결하면서 다시 가까워졌다. 당시 라울 카스트로 의장은 쿠바 정상으로는 23년 만에 모스크바를 방문, ‘러시아ㆍ쿠바 동맹’의 부활을 알렸다.
한편 라브로프 장관은 30일 페루를 방문, 남미 순방을 이어간다. 임기 중 2번째 방문이다.
양국은 자유무역협정(FTA)과 더불어 군사 협력 방안을 집중 논의할 전망이다. 페루는 지난 1969년 이래 끈끈한 대러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으며, 최근 들어 군사 협력을 확대하고 있다. 지난해 12월엔 러시아산 헬리콥터 24기를 도입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對이란 에너지 협력 강화=러시아는 냉전 시기 동서 진영 간 격전지였던 중동에도 손을 뻗치고 있다. 경제 제재로 발이 묶인 이란과 에너지 협력을 강화하면서다. 이란에는 1979년 이란혁명 전까지 친소 정권이 집권했었다.
28일 이란 메흐르 통신에 따르면 미국과 러시아는 총 80억∼100억달러 규모의 에너지 협력 계약을 두고 협상 중이다.
러시아가 500㎿ 규모의 전력을 이란으로 수출하고, 열ㆍ수력 발전소와 송전망 등을 이란에 건설하는 게 골자다. 세부 사항을 놓고 이란에 국빈 방문 중인 알렉산드르 노박 러시아 에너지 장관과 하미드 치트치안 이란 에너지 장관이 지난 27일 협의를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러시아와 이란은 이달 초 이란이 러시아에 하루 50만배럴의 원유를 제공하는 대가로 그에 상당한 장비를 제공받는 200억달러 규모의 원유ㆍ상품 스와프 협상을 추진한 바 있다.
최근 양국 협력의 배경으로 뉴욕타임스(NYT)는 이란의 하산 로하니 정권이 똑같이 서방으로부터 제재를 받고 있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반미’ ‘반서방’ 전략에 공감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버번 대신 칭타오”…中 결속 증대=러시아와 중국 간 경제 협력도 급물살을 타고 있다.
중국은 냉전 시기 소련의 공산주의 진영 라이벌로, 스탈린 사망 이후 양국이 군사 충돌 직전까지 갔던 과거가 있다.
그러나 최근 유럽에선 러시아, 동아시아에선 중국이 미국과 마찰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미국’이란 공통분모가 생긴 양국이 서로에게 손을 내밀고 있는 것이다.
우선 라브로프 장관은 지난 15일 중국을 찾아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 만났다. 시 주석이 “현재 중국과 러시아 관계는 역사상 가장 좋은 시기”라며 훈훈한 분위기를 연출한 가운데, 양측은 양국 간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 확대, 지속적 소통 증대의 필요성을 확인하고 우크라이나 사태와 관련한 양국의 입장을 주고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이어 푸틴 대통령이 오는 5월 중국을 방문, CICA(아시아 교류 및 신뢰구축회의) 정상회담에 참석한다.
한편 미국 정부가 28일 추가 제재 대상에 푸틴 대통령 최측근이자 국영 석유기업 로스네프트의 이고르 세친 최고경영자(CEO)를 올리는 등 제재 강도를 높였지만, 시장에선 러중 관계 개선으로 이 같은 제재 효과가 크지 않을 것이란 회의론이 솔솔 흘러나오고 있다.
한 트레이더는 로이터통신에 이번 제재를 계기로 로스네프트 등 러시아 기업들이 대중 협력을 강화할 것이라면서 “버번(미국 위스키) 대신 칭타오(중국 맥주)를 마시면 된다”고 빗대 설명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