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김기훈 기자] 정만식은 두 얼굴을 가진 배우다. 서글서글 사람 좋은 웃음을 짓다가도 웃음기가 가시면 얼굴에 금세 냉기가 서린다.

그런 그가 영화 ‘대호(연출 박훈정)’에서 복수심에 불타는 도포수 ‘구경’역을 맡아 신혼의 달콤함도 포기하고 과묵하게 지냈단다. 독한 남자고 천생 배우다.

지난 17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헤럴드경제와 만난 정만식은 새신랑답게 아내에 대한 걱정부터 털어놓았다.

“마치 ‘대호’를 찍는 동안 아내가 저를 이해 못한 것처럼 기사가 났는데 집사람이 이해를 못한 게 아니라 제가 독선적이 된 거죠.” 그는 그러곤 쑥스러운 듯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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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3년 12월 결혼식을 올린 그는 ‘대호’에 캐스팅되면서 아내와 불화를 겪을 뻔도 했다. 정만식은 첫 언론시사 후 기자간담회에서 “폐쇄적인 역할이다 보니 아내와 대화하는 데 있어서 문제가 있었다”고 촬영 당시 고충을 전한 바 있다. 오직 머릿속에 호랑이밖에 없는 인물에 몰입하다 보니 자연스레 말이 짧아진 탓이다.

그는 ’전에도 연기에 몰입하느라 비슷한 일을 겪은 적이 있냐‘는 질문에 “이렇게까지 집중하고 이렇게까지 신중히 생각하고 연기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런 만큼 구경 역을 두고 정만식 외엔 다른 배우를 상상할 수 없다. 도저히 대체불가능한 연기다.

‘배우 최민식이 출연하도록 설득했다’는 캐스팅 비하인드 스토리에 대해 정만식은 “설득이 아니라 일방적 통보였다”며 웃으면서 부인했다.

한재덕 사나이픽처스 대표로부터 “최민식 선배가 구경 역에 당신을 낙점했다”는 이야길 전화로 ‘통보’ 받았다는 것. 심지어 그는 통보를 받았을 때 ‘대호’의 시나리오조차 읽어보지도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예스’였다. 최민식에 대한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선택이다. 이후 3일 뒤에야 그는 시나리오를 받아봤다.

“솔직히 글쟁이들이 쓰는 기법이나 방식은 모른다. 그런데 머릿 속에 그림이 그려지면서 시나리오가 한번에 쫙 읽혔다.” 그는 시나리오의 흡입력을 이렇게 표현했다.

이후 작품 준비를 위해 닥치는 대로 호랑이에 대한 자료를 읽고 상상력의 날개를 펼쳤다. 호랑이의 종류와 모양, 변의 크기, 사냥법, 습성 등 자료를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는 “무슨 동물학과 학생처럼 열심히 봤다”면서 “시나리오보다 열심히 본 것 같다”고도 했다.

또 그는 “6개월 동안 휴대전화 배경화면 사진이 아내가 호랑이였다”고 밝혔다. 신혼인 그의 아내가 왜 남편에게 섭섭했을지 충분히 이해가 되고도 남았다. 정만식은 “모든 연기가 상상력과의 투쟁이니, 배우짓 하는 동안은 겪어야하는 ‘전공필수’ 같은 것”이라고 담담히 말했다.

촬영 현장에서도 철저히 건조하고 담백하게 구경 역할에 몰입했다. “원래 현장에서 말장난도 하고 주위가 산만한데 (웃음) 이번엔 캐릭터가 폐쇄적이라 혼자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그는 털어놓았다.

그는 “실제 생활도 굉장히 차분해졌다”며 “주변 사람들과의 대화도 한번 두번 더 생각하고 이야기하게 되고…. 영화가 사람을 만들고 있다”고 했다.

한편 정만식은 구경의 매력에 대해 “오로지 (대호) 하나만 보고 간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면서 “(돈이고 명예고) 딴 건 필요 없다. 그놈만 잡겠다는 목표 의식이 좋았던 것 같다”고 평가했다. 영화 속 구경은 오직 대호를 잡겠다는 단순한 욕망에 사로잡힌 인물이면서도 단순히 ‘악역’이란 말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캐릭터다. 차라리 복수를 향한 집념 그 자체다.

만약 구경이 대호를 잡는데 성공했다면 어찌 됐을까? 영화 ‘대호’를 본 관객이라면 이런 궁금증을 가질 법도 하다.

정만식은 언젠가 박훈정 감독과 이야길 나눈 적이 있다고 했다. “아마도 구경은 아편쟁이가 됐을 거다. (대호를 잡겠다는) 의지와 목표를 상실했으니 삶이 공허해지지 않겠냐 싶다.”

한편 여러 작품에서 악역과 인연이 많았던 그지만 ‘대호’를 통해 비로소 자신의 필모그래피의 맨 앞자리에 연기를 선보였다는 게 세간의 평가다.

정만식은 “역할도 역할이지만 호랑이가 나오는 영화 자체가 한국 영화에서 새 도전이고 새 시도였다. 그 안에 함께 했다는 게 뜻깊다”고 했다. 이어 “이런 역할을 만나는 것은 참 흔치 않은 일”이라면서 “이렇게 힘과 무게를 가진 캐릭터가 나를 거부하지 않고 잘 만나줘서 고마웠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