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원승일 기자] 동백동산에는 ‘혹통’ ‘먼물깍습지’, 한라산 중턱에는 ‘숨은물뱅듸’. 이름만큼이나 희귀한 제주의 습지들을 만났다. 22일 생태관광으로 찾은 이들 보고(寶庫) 원시 습지들은 원시적인 자연상태를 그대로 보전하면서 제주 고유의 이야기들을 품고 있었다.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 일원에 있는 동백동산에는 50여개의 크고 작은 습지들이 있다. 이 중 ‘혹처럼 튀어나와 보이는 물’이라고 지어진 ‘혹통’은 소, 말들을 먹이고, 남녀가 목욕을 했던 곳이란다.
한참을 들어가다 만난 ‘먼물깍습지’는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뜻의 ‘먼물’과 끄트머리란 의미의 ‘깍’이 붙어져 만들어진 이름이다. 용암이 빠르게 흘러 생성된 이 습지는 빗물이 채워져 마을 주민들에게는 생활용수로, 가축들에게는 마실 물로 이용됐다.
동백동산 습지에는 ‘생물 다양성의 보고’라 불릴 만큼 중국물부추, 제주고사리삼 등 특이식물들과 말똥가리, 팔색조 등 멸종위기종을 포함해 총 271종의 동ㆍ식물이 서식 중이다. 이름처럼 많은 동백나무는 하늘을 찌르듯 쭉쭉 뻗어 숲을 이루고 있었는데 햇볕이 잘 들지 않는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멸종위기 종으로 7그루가 전부인 개가시나무는 필요없는 껍질을 우두둑 떨어트린다 해서 마을 주민들은 ‘똥 누는 나무’라 불렀다.
한라산 1100고지를 올라가다 만난 ‘숨은물뱅듸’는 화산오름 사이에 숨겨져 있다는 ‘숨은 물’과 벌판이란 뜻의 ‘뱅듸’가 붙어져 만들어진 이름이다. 한라산 980m 고지에 드물게 발달한 고산습지인 숨은물뱅듸는 낙엽이 퇴적돼 생성된 두꺼운 이탄층으로 습지가 지속적으로 발달, 유지되고 있다. 또 식충식물인 자주땅귀개, 벌매 등 멸종위기종을 포함해 총 493종의 야생생물이 이 습지에서 나오는 물과 먹이를 먹으며 살고 있다.
현재 제주에는 동백동산 습지, 숨은물뱅듸와 함께 물영아리, 물장오리, 1100고지 등 5곳이 람사르습지로 지정돼 있다.
람사르협약에서는 희귀하거나 독특한 습지 유형을 포함하는 지역이나 생물다양성 보전을 위해 국제적으로 중요한 지역을 람사르습지로 등록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에는 제주 5곳을 포함해 총 21곳이 람사르습지로 지정돼 있다.
이곳 마을 사람들은 ‘생명약속’을 통해 사람과 동ㆍ식물이 공존하는 습지를 귀하게 여기고 보전할 것을 다짐하기도 했다. 마을주민이면서 해설사로 활동 중인 문윤숙 씨는 “외부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면 습지가 훼손될 것을 우려해 주민들이 처음에는 습지 지정을 반대하기도 했다”며 “지금은 생태관광을 통해 주민들이 나서서 생물다양성과 습지의 보전 가치를 알리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는 현재 제주 선흘1리 마을을 포함해 인제 생태마을, 고창 용계마을, 신안 영산도 명품마을 등 4곳을 생태관광 성공모델로 육성 중이다. 환경적으로 보전가치가 있고, 생태계 보호의 중요성을 교육함과 동시에 지역 경제에도 도움을 주기 위해서다.
실제 선흘리 마을이 식당, 민박 등 생태관광으로 벌어들인 소득은 지난해 6억9000만원으로 전년(4억8000만원)보다 2억원 가량 늘었다.
다만 습지는 생태관광으로서 적절한 이용과 관리 및 보전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는 게 마을 주민들의 생각이다. 동백동산 내 습지 중 먼물깍습지 하나만 교육용으로 개방하고, 나머지는 일반인 출입 금지 구역으로 정한 것도 이 때문이다.
현원학 제주생태교육연구소 소장은 “습지 생태관광은 사전에 민감도, 생태 수용능력 등을 조사해 생물에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뤄져야 한다”며 “물 저장, 생물다양성, 기후 변화 대응 등 습지가 갖고 있는 가치를 교육, 연구하는 목적으로 이용하되 관리와 보전 노력을 함께 해야한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