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박수진 기자] 대책 없이 자살 위험만 높아진 일명 ‘자살 무방비 사회’에서 자살은 감춰야 하는 일, 홀로 고통받아야 하는 일이 됐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자살률 1위라는 오명을 안고 살지만 구체적인 대책 마련은 사실상 전무했던 것이 대한민국의 부끄러운 현실이다.
‘자살 예방 접종’이 이뤄지지 않은 사회에서 사람들은 도움의 손길을 받지 못한 채 스스로 목숨을 끊고, 남겨진 가족들은 또 다른 고통에 힘겨워하다 결국 다시 자살 위험에 놓이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자살률을 낮추기 위해선 ‘고위험군 파악→맞춤형 자살 예방프로그램 마련→자살에 대한 사회적 인식 개선’으로 이어지는 3단계 대책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자살자 유족ㆍ노인 등 ‘자살 고위험군’ 실태 파악=당장 자살의 위험에 놓인 고위험군의 실태를 파악해 사례 관리가 우선돼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자살 고위험군은 자살자 유족이나, 다른 연령대에 비해 자살률이 더 높은 60대 이상 노인층을 뜻한다.
자살자 유족의 경우 현재 통계 조차 집계 되지 않고 있는 현실이다. 자살자를 바라보는 사회의 부정적 인식 때문에 유족들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으려 한다는 점도 실태 파악이 어려운 이유 중 하나다.
나선영 한국생명의전화 사무국장은 “지자체 정신보건센터마다 유가족 지원에 대한 사업을 계획하고 있지만 대상자를 확보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정신보건센터는 자신의 인적 사항을 다 밝혀야 하는데 유족들이 이에 대한 거부감이 있다”며 “정부 뿐만 아니라 다소 (유족들의) 접근이 쉬운 민간단체에서 유족 지원 사업을 활성화 할 수 있게 되면 유족들의 실태 파악 및 사례관리도 더욱 용이할 것”이라고 말했다.
노인의 경우 자살자 유족에 비해서는 통계청 등 국가 기관에서 매년 인구를 파악하고 있지만 독거노인 등에 대한 구체적인 실태 파악은 여전히 미비한 상태다. 노인 인구의 비율이 높은 시골지역의 자살도 최근 문제가 되고 있지만 자살예방센터는 주로 수도권과 지방 광역시도에 집중돼있어 실태 파악 및 사례 관리가 어렵다.
김동현 한림대 의대 교수는 “노인 자살은 다른 연령대에 비해 자살 원인이 다소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사회가 대책을 마련하지 않아 사실상 방치되고 있는 현실”이라며 “한국의 자살률 증가에 견인차 역할을 하는 것이 노인 자살인 만큼 실태 파악이 시급히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연령ㆍ지역ㆍ상황에 맞는 맞춤형 예방책 마련=고위험군의 실태 파악이 이뤄졌다면 이에 대한 맞춤형 예방책이 마련돼야 한다. 연령이나 지역, 상황에 따라 자살 위험의 이유가 다른 만큼 대책도 특성에 맞게 만들어져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이유진 가천대 의대 교수(인천시 자살예방센터장)는 “거시적 자살대책과 동시에 지역, 연령, 직업군에 맞는 미시적 예방대책도 필요하다”며 “예를 들면 시골지역은 농약을 마시고 자살하는 사례가 많으니 농약관리를 엄격히 하거나 이에 대한 예방교육을 실시하는 대책들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자살자 유가족의 경우는 더욱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 가족의 자살로 경찰 조사를 받을 때도 이들이 심리적 상처를 최소화할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 일례로 자살사고 발생 시 전문 상담원의 입회 하에 경찰 조사를 받도록 해 심리적 외상을 줄이고 이후 자살 위험에 빠지는 것을 예방할 수 있게 도와줘야 한다.
나 사무국장은 “많은 유족들이 ‘가족의 자살 후 누군가 나를 잡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덜 힘들었을 것이다. 정보가 없어서 더 힘들었다’고 말한다”며 “성폭행 범죄 피해자의 경우 해바라기아동센터 등 전문기관에서 상담원을 지원하는 것처럼 자살자의 유가족들에게도 이런 지원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자살의 심각성에 대한 인식 정립=자살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제대로 정립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자살을 미화해서는 안되지만 비난의 대상으로 삼아서도 안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대책 없는 비난은 자살 고위험군에 놓인 이들을 사회의 그늘로 몰아낼 뿐 해결엔 아무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자살의 심각성에 대한 국가적 인식이 정립돼야 하고 이를 위해 국가적 캠페인도 필요하다. 우리사회는 아직까지 자살을 금기시해야하는 존재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며 “자살이 심각한 사회적 문제가 됐다는 것을 인식하고 언론 등을 통해 대대적인 예방 캠페인을 시행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윤대현 서울대병원 교수는 “자살자 유족의 경우 지속적인 관리와 치료 등 보호막이 필요한데 우리 사회는 되레 그들을 비난한다. 실제로 자살자의 장례를 거부하는 장례식장도 있고, 보험사에서도 보험혜택 적용을 하는데 있어서 가족들을 범죄자 취급하기도 한다”며 잘못된 실태를 꼬집었다.
최명민 백석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자살 위험에 놓인 사람들은 정신적인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도 이를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는다. 치료를 거부하다가 상황을 악화 시키는 경향이 우리 사회에 아직 많이 남아 있다”며 인식 개선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