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 카락스 감독의 ‘홀리 모터스’는 9개의 서로 다른 배역을 연기하는 배우 ‘오스카’(드니 라방 분)의 하룻 동안의 이야기다.
이른 아침, 오스카는 여느 가장처럼 ‘브리프 케이스’를 손에 들고, 어린 자식의 배웅을 받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고급 리무진에 올라탄 그에게 주어진 첫 배역은 백발의 성공한 사업가다. 비서로부터 서류를 건네받은 그는 휴대폰을 들고 ‘물가 연동 국채’ 운운하며 업무 지시를 내린 후, 또 다른 파일을 받아들고는 차안에서 가발을 쓰고, 얼굴에 분을 바르는 등 분주하게 변장한다. 이윽고 리무진에서 파리의 도심에 내린 사람은 허리가 잔뜩 굽고 낡은 옷을 겹쳐 입은 누추하기 짝이 없는 행색의 걸인이다.
오고가는 시민들 틈에서 구걸하던 걸인은 다시 리무진에 올라탄 뒤 영화 촬영장에서 전혀 다른 인물이 돼서 내린다. 몸에 꽉 끼는 특수 촬영용 수트를 입고 온 몸에는 야광 센서를 부착한 ‘모션 캡처 전문 배우’다.
이때쯤 눈치빠른 관객이라면 오스카가 차안에서 받아 열던 파일이 다음의 배역을 위한 ‘시나리오’ 였으며, 리무진에 올라탄 ‘백발의 사업가’와 파리 시내의 ‘걸인’, 촬영 스튜디오의 ‘모션 캡쳐 배우’는 오스카가 서로 다른 작품 속에서 연기를 맡은 배역임을 깨닫게 된다. 오스카는 광인과 막간극의 아코디언 연주자, 암살자, 희생자, 죽어가는 노인 등으로 변신을 이어간다.
하루의 모든 일정을 끝낸 오스카가 집으로 귀가하는 초라한 행색의 중년 남자가 됐을 때, 관객들의 깨달음은 다시 혼돈의 영화 첫 장으로 되돌아간다. 저 사람은 오스카 그 자신일까, 오스카가 연기하는 ‘일당 벌이 배우’일까. 아침에 자식의 배웅을 받으며 길을 나섰던 백발의 사업가와 동일인일까 다른 사람일까? ‘오스카’를 연기하는 배우 드니 라방의 존재는 영화 속 수많은 인물들 가운데 어디쯤에 있는 것일까. 감독 레오 카락스가 직접 출연해 극장으로 통하는 비밀의 문을 여는 영화 첫 장면까지 더해, 관객들은 현실과 스크린, 배우와 캐릭터 사이의 경계에서 놀랄만한 모험을 하게 되는 셈이다.
‘홀리 모터스’는 레오 카락스가 전작(‘나쁜 피’ ‘소년 소녀를 만나다’ ‘퐁네프의 연인들’)에서 영화적 분신으로 삼아왔던 배우 드니 라방을 통해 인생이라는 무대 혹은 ‘스크린’, 그리고 삶이라는 ‘연기’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홀리 모터스’의 오스카는 탄생과 죽음, 만남과 이별, 자아와 타자의 경계를 넘나들며 갖가지 배역으로서 ‘윤회’하는 ‘영화적 삶’으로서 연기를 보여준다.
여기서 배우가 연기하는 인생이란 죽음을 경험하는 비극이자, 연인과 헤어지는 멜로드라마이며, 아버지가 딸을 걱정하는 가족드라마이고, 보이지 않는 상대와 대적하는 액션영화이고, 묘지를 떠도는 호러물 등 갖가지 장르로 상연되는, 하룻동안의 긴 꿈이자 결국 무대 위에 홀로남는 쓸쓸한 1인극이다. 그리고 꿈과 현실은 인연과 업보가 윤회의 고리를 이루는 삶이자, 안과 바깥이 구분되지 않은 채 면(面)을 이루는 ‘뫼비우스의 띠’로서의 영화다. 과연 관객인 당신이 연기하게 될 인생의 다음 ‘시나리오’는 무엇일까.
4일 개봉. 청소년관람불가.
이형석 기자/suk@heraldcorp.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