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김영상 기자]우스갯 소리 하나 하겠다. 우리가 흥이 나면 종종 부르는 노래가 있다. ‘갑돌이와 갑순이’. 누구나 알듯이, 가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갑돌이와 갑순이는 한마을에 살았더래요. 둘이는 서로 서로 사랑을 했더래요~.”
갑(甲)이다, 을(乙)이다 세상이 시끄럽다보니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왜, 갑돌이와 갑순이일까. 갑돌이와 을순이일 수도 있고, 을돌이와 갑순이 일수도 있는데 하필 갑돌이, 갑순이일까. 갑돌이와 을순이, 을돌이와 갑순이가 서로 사랑을 하면 더 좋지 않았을까.
물론 노래의 인물 이름과 최근 냄비처럼 펄펄 끓어오르는 갑을(甲乙) 화두와는 관계가 없다. 오랫동안 갑병(炳)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우리 사회, 아주 오랫동안 을의 눈물을 지켜봐야했던 우리 사회의 어두운 상처를 들춰보면서 얼핏 든 생각일 뿐이다.
하지만 간과할 일은 아니다. 우리 사회는 뜻은 다를지 몰라도 ‘갑‘이라는 단어를 선호한다. ‘을’은 왠지 발을 담그고 싶지 않는 기피의 단어다. 갑 하면 떠오는 것은 위엄과 명예이고, 을 하면 떠오르는 것은 소외와 눈물인 것이다.
정치권에서 갑을문화 개선에 나서고 있는 것은 이때문이다. 갑의 횡포와 을의 눈물이 있는한 새로운 소통의 시대, 새로운 상생의 시대는 없다는 위기감의 발로다.
방향은 맞다. 라면 상무, 남양유업 사건 등에서 보듯이 갑의 우월감과 횡포를 제거하지 않는한 공존공생의 자본주의 3.0은 요원해 보인다.
그렇지만 갑을 먹이사슬을 끊겠다고 나서는 국회의 갑을개선 입법 파상 공세는 또다른 갑의 횡포일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경제민주화와 관련한 수퍼갑 국회의 무소불위 권력을 과시하는 것 뿐이라는 시각도 나온다.
보다 근원적 고찰이 필요해 보인다. 갑을 문제는 너무나 복잡하다. 갑을은 상대적이다. 영원한 갑은 없다. 갑도 누군가에는 을이고, 을도 누군가에는 갑이다. 초강력 접착제로 끈적끈적하게 붙어있는 갑을 먹이사슬을 강제적인 규제로는 떼낼수는 없어 보인다. 갑을 화두가 터지면서 등장하는 떼쓰기, 저주, 징벌 등의 단어와 함께 초대형 입법만을 불 지피는 것은 우리 사회 갈등을 더 키우는 일이라는 일각의 지적은 귀에 담을 만 하다. “모든 기업(대기업)을 갑의 횡포로 몰아세우고, 을의 눈물을 닦아주지 않으면 생사에 영향을 줄 정도로 강제하겠다는 것은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을 태우는’ 일”이라는 얘기도 일리가 있다.
그래서 갑을문화 개선을 위한 입법도 필요하지만, 갑을 소통을 위한 사회적 공감대 확산 작업이 더 중요하다는 시각도 제기된다. 갑을관계는 사람의 문제이기에, 법으로 강제하기 전에 사람과 사람이 풀어야 할 문제라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존중, 약자에 대한 배려를 사회 구성원 가슴 속에 스며들게 하는 장기적인 프로젝트가 더 유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경쟁과 욕심이 있는 한 갑은 사라지지 않는다. 을이었다고 해도, 언젠가 갑 위치에 가면 윽박지르기만 하는 ‘갑 노릇‘을 할 게 잘못된 세상 이치다. 노회찬 진보정의당 공동대표는 “갑이 설사 을의 눈물을 닦아준다고 해도, 수많은 을끼리의 경쟁이 있고 잠재적 갑이 늘 존재하는 한 을의 눈물은 그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무엇으로 갑을(甲乙)의 갑옷을 깰 것인가. 공존공생의 자본주의 3.0을 정착시키기 위한 참으로 어려운 숙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