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양대근 기자] #1. 2011년 모 연금공단 고위직 아들의 결혼식이 열렸다. 이 자리에는 증권사ㆍ자산운용사 사장에서부터 말단 영업직원까지 모두 참석했다. 결혼식 관계자는 “축의금 내는 곳이 마치 거대한 로비의 장처럼 보였다”고 회상했다.

#2. 중소형 증권사에서 근무하는 30대 후반 애널리스트 A 씨는 지난달 한 코스닥업체로부터 소송 위협을 받았다. 작성한 리포트 내용의 일부가 기사에 부정적으로 인용돼 결과적으로 회사 주가가 하락했다는 것이다.

세계 어느 곳이 돈과 권력을 중심으로 갑을관계가 생겨난다. ‘돈의 논리’가 유독 강한 여의도 증권가는 양자 관계가 어느 곳보다 복잡하다. 서로 물고 물리는 약육강식의 세계지만 원리는 의외로 간단하다. 누구든 돈줄을 쥐고 있는 쪽이 ‘갑(甲)’이 된다.

▶애널리스트 ‘증권가의 꽃?’, 여의도의 대표 을(乙)=흔히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증권가의 꽃’으로 불린다. 억대 연봉에다 높은 전문성이 요구된다. 하지만 밖에서 보이는 화려함에 비해 실생활은 고되다. 밤 10시 퇴근은 기본이고 밤 새우는 날도 부지기수다.

애널리스트에게 ‘갑’은 펀드매니저다. 펀드매니저는 주식 매매 주문을 내기 때문에 어느 증권사에 주문을 내느냐에 따라 증권사의 수수료 수입이 달라진다. 애널리스트의 가장 중요 임무 중 하나는 리포트를 통해 펀드매니저의 관심을 끄는 것이다. 매니저의 주문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실력보다 친분이 더 주효할 때가 많다.

반면 애널리스트는 기업의 IR(기업홍보) 담당자 앞에선 당당해진다. 특정 기업을 탐방하고 리포트를 작성하는 입장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상은 빛 좋은 개살구다. 애널리스트가 ‘매도’ 의견 리포트를 내기라도 하면 상황은 반전된다. 대기업의 경우 애널리스트를 아예 출입금지시켜버리고 코스닥업체는 “주가가 떨어졌다”며 소송도 불사한다.

애널리스트의 전 단계인 리서치 어시스턴트(RA)는 여의도 먹이사슬에서 가장 아랫단계에 위치해 있다. 선임을 ‘뒤치다꺼리’ 해야 하는 RA는 “사람이 아니라 앞으로 부화하게 될 알”이라는 웃지 못할 별명도 따라붙는다. 2009년에는 모 증권사 RA가 과도한 업무 스트레스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너무 복잡하네’ 자산운용사를 둘러싼 촘촘한 먹이사슬=자산운용사를 둘러싼 먹이사슬은 한층 더 복잡하다. 운용사 펀드매니저는 애널리스트에겐 갑이지만 연기금과 같은 큰 손에는 ‘을’이다.

운용사의 마케팅 담당자(마케터)도 대표적 ‘을’에 포함된다. 자회사 펀드를 판매사에 걸어야 하는 마케터 입장에서는 판매사인 증권사와 은행의 상품기획 담당자가 갑 중의 갑이다.

하지만 운용사와 판매사가 같은 계열사로 묶여 있는 경우는 얘기가 달라진다. 계열사 간 ‘일감 몰아주기’ 덕분이다. 반면 중소형 운용사나 외국계 운용사처럼 계열사가 없는 경우 판로 개척이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다.

외국계 운용사의 한 임원은 “국내 운용사는 판매처가 확보돼 있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해 어려움이 더욱 크다”고 호소했다.

숨겨진 먹이사슬은 또 있다. 바로 수탁업무 관계다. 국내 운용사는 총 300조원에 달하는 펀드 자금을 전부 은행에 맡기고 이에 따른 수수료를 지불한다. 돈을 맡길 은행에 대한 선택권은 전적으로 운용사에 있다.

국내 대형 운용사의 모 팀장은 “은행이 자금 유치를 위해 수탁업무 담당자를 운용사에서 스카우트해 앉히는 경우가 많다”고 귀띔했다.

▶‘인맥과 접대의 결정체’ 증권사 영업맨(브로커)의 세계=증권사의 법인영업 직원은 애널리스트와 기관투자자를 연결해주는 역할을 한다. 이들에게는 어느 기관의 매니저로부터 얼마나 주문을 많이 받느냐가 증권사 수익과 직결된다. 갑은 연기금이나 공제회 사람이다. 국민연금은 기금 규모가 400조원에 달하다보니 증권사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슈퍼갑’이다.

따라서 증권사 영업맨에게는 인적 네트워크 관리가 생명이다. 네트워크를 관리하기 위한 접대 종류도 다양하다. 술과 골프 접대는 물론 자녀 유치원비나 경조사비를 대신 내주는 경우도 허다하다.

재작년에는 모 연금 직원이 증권사로부터 성접대를 받아 경찰에 입건되기도 했다. 최근에는 한 공제회의 자금운용 책임자가 투자회사로부터 호텔 숙박비 등 4000만원 상당의 금품을 제공받아 감사원에 적발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같은 사례는 표면적인 부분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채권시장은 주식시장보다 더욱 폐쇄적이다. 중개의 대부분이 장외거래를 통해 이뤄지는 채권시장은 체결가격 형성에 있어 증권사 브로커와 해당 매니저의 친분이 큰 역할을 하기도 한다.

▶‘영원한 갑은 없다’ 변화하는 여의도 갑을관계=‘돈의 논리’가 지배하는 여의도의 풍경도 조금씩 변하고 있다. 최근 남양유업 사태 등으로 촉발된 사회적 분위기와 맞물려 내부적으로 자성의 목소리가 적지 않다.

여의도의 대표적 권력기관인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부터 변화의 의지를 강하게 나타냈다.

최수현 금감원장은 지난달 15일 증권사 최고경영자(CEO)와의 간담회에서 “갑의 위치를 내려놓고 낮은 자세로 임하겠다”고 강조했다.

국민연금도 2011년 이후 많은 변화를 보이고 있다. 증권사나 운용사 등이 국민연금에 로비를 하다 적발되면 최장 5년간 공단과의 거래를 금지하는 제도가 시행 중이다.

펀드매니저 역시 운용사별로 내부 통제 기준을 만들고 윤리적 책임을 강화하는 추세다. 지난 4월 금융위에서 의결된 ‘금융투자업 규정 개정안’에 따라 10월부터는 ‘소프트달러’ 내역을 자산운용보고서에 기재해야 한다. 소프트달러는 운용사가 리서치에 대한 대가를 ‘위탁매매 수수료’에 포함시켜 증권사에 지급하는 금액으로, ‘리베이트 관행’의 온상으로 불려왔다.

이인형 자본시장연구원 자본시장실장은 “증권업계의 갑을관계 자체보다는 그로 인한 모럴해저드와 대리인 문제가 더 심각하다”면서 “로비가 심해질수록 서비스 가격이 계속 전가되기 때문에 최종적인 피해자는 결국 일반투자자가 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