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이지웅ㆍ박사라(인턴) 기자] 이태원의 이름에는 우리 민족의 역사가 담겨있다. 배나무가 많아 ‘참배 리(梨)’ 자를 썼다고도, 혹은 삼을 심고 홍야를 경작하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산다고 해서 ‘오얏 리(李)’ 자를 썼다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 이태원에 있는 ‘운종사(雲鍾寺)’라는 절의 여승들이 왜군에게 겁탈을 당했다고 해서 ‘다를 이(異)’, ‘태아 태(胎)’ 자를 쓴다는 슬픈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름의 유래를 두고 학계에서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하지만 옛날 고지도를 보면 ‘두 이(二)’ 자를 쓰기도 했습니다.” 이현군(44) 한국고지도연구학회 이사의 설명이다. 이태원의 ‘이’가 정말 ‘두 이’를 나타내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과거에도 현재도 이태원이 ‘두 가지 얼굴’을 지녀왔다는 사실이다.
▶조선시대 지리적 요충지= 조선시대 초기부터 이태원은 교통의 중심지로서 번영을 누림과 동시에 침략의 고통을 겪어왔다. 이는 도성과 한강을 연결하는 지리적 요충지로서 가져야만 했던 숙명이었다.
이 이사는 “외국인들이 한강을 통해 도성에 들어오건 남대문을 통해 도성에서 나오건, 이태원을 거쳐야 했으니 그야말로 이방인들의 집결지였다”고 말했다.
이런 지리적 이점은 이태원을 끊임없이 외세에 시달리게 만들었다. 1952년 임진왜란 때는 일본 군대가, 1880년 임오군란 때는 청나라 군대가 각각 주둔했다. 이후 1910년 일본이 조선에 대한 식민 지배를 시작하며 일본군 조선사령부를 세운 곳도, 1945년 해방 후 미8군이 사령부를 설립한 곳도 모두 이태원이다.
▶한국전쟁 이후 유흥문화 발원= 이태원이 유흥문화의 중심지로 떠오른 것은 한국전쟁이 끝나면서부터다. 용산 미군기지에 주둔한 미군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면서 미국식 클럽과 주점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1957년 미군의 외박과 외출이 허용되면서는 기지촌까지 생겼다.
“소방서 골목마다 서성대는 짙은 화장을 한 여자들은/ 길가는 남자마다 붙들고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걸까” 1990년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 부른 ‘이태원 이야기’ 가사에는 70ㆍ80년대 이태원의 유흥 문화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하지만 유흥만이 이태원의 전부는 아니다. 이태원 상권의 특징은 양지상권ㆍ음지상권이 공존(共存)한다는 것이다. 해밀턴 호텔을 중심으로 동쪽에 유흥문화가 발전했다면, 서쪽은 국제적 쇼핑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첫 단추는 1980년대 ‘86아시안게임’ ‘88서울올림픽’ 개최였다. 본격적인 개방의 시대가 열리자 외래 문물이 뒤섞인 이태원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글로벌 관광지로 떠올랐다. 1997년 관광특구로 지정된 이후 이태원은 고급 관광복합문화 공간으로 거듭났고, 유동인구도 크게 늘어났다.
▶60~80년대 경제적 양극화= 판자촌과 고급 대저택이 공존하는 경제적 양극화도 이태원이 가진 이중성을 잘 보여준다. 1960년대 각국의 대사관이 이태원 지역에 대거 입주하면서 남산 기슭의 하얏트호텔과 이태원동, 한남동 일대에는 1970년대까지 지속적으로 고급주택단지가 조성됐다. 반면 80년대 아시아계, 아프리카계 외국인의 유입이 늘면서 이른바 ‘쪽방촌’도 생겼다. 아직도 이태원동 남쪽, 보광동 일대에는 부유한 대저택 뒷편으로 판잣집이 즐비하게 늘어선 경관이 남아 있다.
이태원의 한 부동산 관계자는 “재개발로 인해 판자촌 지역은 많이 사라졌지만 외교관, 대기업 총수 일가 등 최고위 부유층과 외국인 근로자들이 사는 지역은 여전히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다”고 말했다.
▶이태원…다문화의 메카로= 이태원을 보면 우리 사회 다문화의 현(現) 주소를 알 수 있다. 이태원은 영화 ‘이태원 살인사건’의 배경이 될 정도로 매일 같이 외국인 범죄가 일어나는 장소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이 2013년 펴낸 보고서에 따르면 이태원을 비롯한 외국인 밀집지역의 범죄율은 2007년 1만4524명에서 2011년 2만7144명으로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
하지만 이태원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다양한 인종ㆍ계층ㆍ성ㆍ종교를 감싸안는 포용과 관대의 도시이기도 하다. 2009년 서울시 조사결과에 따르면 외국인이 가장 선호하는 거주 장소로 ‘이태원‘이 꼽혔다.
이은정 한국다문화센터 아카데미 운영위원장은 “이태원은 예로부터 문물교류ㆍ인종교류ㆍ종교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져 온 장소”라며 “다문화 시대라고 구청, 관마다 경쟁적으로 성과내기용 다문화 축제를 열지만, 이태원만큼 자발적ㆍ자생적으로 다문화 축제가 이루어지는 곳은 흔치 않다”고 말했다.
이태원의 두 얼굴은 곧 조선시대부터 이방인에 의해 웃고 울었던 우리 민족의 두 얼굴이다. 지금도 우리 사회는 이태원 범죄 소식을 들으면서는 분노를, 다문화 교류의 현장을 바라보면서는 공감과 유대를 느낀다. 앞으로 이태원이 또 어떤 얼굴로 변모해나갈지, 그 곳의 ‘내일’이 궁금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