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김현경 기자] 저는 태극기입니다. 올해 131살 먹은 할아버지죠. 비록 지금은 ‘뒷방 늙은이’가 됐지만 저에게도 잘 나가던 ‘왕년’이 있었습니다. 한복을 입은 소녀들이 저를 들고 만세를 외쳤을 때는 가슴이 뜨거웠고 고사리같은 손을 가진 아이들부터 늠름한 장정까지 저를 바라보며 경례를 할 때는 뿌듯했습니다.

그런데 세월에는 장사가 없더군요. 저는 점점 잊혀지고 찬밥 신세가 돼 갔습니다. 평상시에는 고사하고 국경일에도 저를 기억해 주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옛날에는 집집마다 저를 모셨는데 지금은 저를 집안에 들이지 않거나 구석에 처박아 두기 일쑤입니다. 저를 제대로 그리지 못하는 아이들도 있고요.

올해 광복절을 앞두고는 혹시 저를 찾는 사람이 많지 않을까 잠시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역시더군요. 대형마트에서는 저를 데려가는 사람이 지난해보다도 8% 줄었다고 합니다. 워낙 찾는 사람이 없어 구석진 곳에 있은 지도 오래입니다. 일반인들이 저를 잊어 가는 것도 슬프지만 공공기관마저 저를 괄시하는 것은 더 서럽습니다. 구청들은 해가 갈수록 저를 덜 사갑니다.

서울 동대문구는 지난해 620만원이던 태극기 구입 예산이 올해 330만원으로 절반 가량 줄었습니다. 영등포구의 태극기 구입 예산은 2011년 1750만원에서 2012년 1400만원, 올해 1050만원으로 계속 깎였습니다. 종로구 내 주민센터들도 2011년에는 1000만원을 투자했지만 지난해에는 621만원, 올해는 595만원으로 점점 예산을 줄이고 있습니다. 금천구는 태극기 구매 집행을 줄여 2010년 640만원어치를 사갔지만 2011년에는 298만원, 지난해에는 286만원만 태극기 구입에 사용했습니다.

전반적인 구 예산이 줄어들다보니 저한테 투자하는 돈도 줄여서 아껴 쓰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섭섭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제 얼굴이 더러워지면 세탁은 안 하고 교체만 하는데 상대적으로 깨끗한 것은 재활용하고 상태가 많이 안 좋은 것만 바꾼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매년 새단장을 했지만 지금은 더러워져도 참아야 하는 신세가 됐습니다.

저를 20년 넘게 만들어온 한 친구는 요즘 그 어느 때보다도 먹고 살기가 힘들다고 하소연을 합니다. 5년 전에 비해 매출이 절반도 안 돼서 회사 문을 닫아야 할 판이라고 합니다. 일반인 손님은 거의 없고 그나마 정부가 주고객이었는데 이제는 정부에서 사 가는 물량도 줄었다고 했습니다.

다른 물가는 다 오르지만 제 가격은 오르지도 않아 이윤을 남기는 건 둘째 치고 회사 운영 자체가 어려워졌다며 친구는 한숨을 내뱉었습니다. 정부에서 구매 협상을 할 때 물가 상승분을 반영해줘야 하는데 예산이 없다는 이유로 매년 같은 가격을 요구하다보니 울며 겨자 먹기로 10년 전과 같은 가격에 넘겨야 한다고 했습니다.

“정부에서 태극기에 별로 관심이 없어진 것 같다”며 “이윤이 안 남더라도 수요가 많아져서 공장이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친구를 보니 제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저에게 새 옷을 입혀주지 못하면 관리라도 제대로 해주면 좋으련만 누렇게 색이 변하고 훼손이 된 모습도 자주 눈에 띕니다. 비바람이 몰아치고 함박눈이 내려도 저를 그대로 내버려두는 곳도 많습니다. 그럴 때면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시려옵니다.

구겨진 저의 모습, 거꾸로 달린 저의 모습을 보면 ‘그래도 내가 이 나라의 상징인데…’ 하는 아쉬움이 밀려옵니다.

저를 책임지고 관리하는 곳이 없어서 더 그렇다는 생각도 듭니다. 안전행정부에서는 저를 사거나 관리하는 업무를 총괄하지 않고 각 지방자치단체에서 자율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자체들도 구청에서 동 단위까지 다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예산에 맞게 저를 구입해서 동에 배분하는 수준입니다. 주민센터에서 저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고요. 안행부가 1년에 2번 무작위로 현장을 점검해 상태가 안 좋은 곳은 시정 조치를 한다고 하지만 턱없이 부족해 보입니다.

국경일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저를 달았는지 통계조차 하나 없습니다. 그냥 막연히 ‘요즘 누가 그런 거 챙기나’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늙은이의 욕심일 수 있지만 저는 아직도 기대를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월드컵 때 저를 머리에 두르고 옷으로 입던 젊은이들에게서 저는 희망을 봤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를 기억하며 자랑스러워 하고, 사방에 제가 휘날리는 전성기가 다시 한 번 찾아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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