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구효서의 ‘메리 코코아 추석’
백년 만의 더위도 언제 그랬냐 싶게 멀게 느껴지는 계절입니다. 올해 추석 차례상에 올려질 과일은 한여름 뜨거웠던 태양의 빛을 머금고 그 어느 때보다 달고 단단하게 여물었습니다. 색색의 과일이 풍성한 계절은 그냥 흐뭇합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찾아뵙지 못했던 가족과 친지를 만나러 가는 추석 고향길, 소설가 구효서 씨의 추석이야기가 함께합니다.
형님의 올해 추석 성묫길에는 선물이 하나 더 늘었습니다. 8촌 형수에게 드릴 포도씨유와 외숙이 좋아하는 잣은 해마다 준비하던 거였습니다. 올해는 거기에다 커다란 코코아 한 봉지가 새로 더해진 것입니다. 촌수가 좀 멀기는 하지만 외6촌 형수를 위한 것이었죠.
멀지 않은 강화도가 고향이라 일찌감치 차례를 지내고 가족은 서울을 벗어났습니다. 형님은 저보다 일곱살이 많고 손주가 셋이지만 저에겐 그다지 노인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12인승 승합차도 형님이 직접 운전했으니까요. 차에 함께 탄 형님의 어린 손주들은 커다란 코코아 봉지가 아무래도 궁금했던 모양입니다. 자꾸 기웃거리고 만지작거렸습니다.
“너희들에겐 맛이 없을 거다. 원조 코코아라서 쓰거든.”
형님은 손주들에게 코코아의 유래를 설명하느라 14세기 멕시코에서 출발해 런던과 암스테르담을 거쳐 바삐 프랑스로 갔습니다. 아이들은 코코아와 초콜릿이 처음부터 그렇게 달콤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그렇게 쓴 것을 누가 먹겠느냐며 아이들은 투덜거렸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코코아 분말은 추석 명절 선물 목록과는 좀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미 눈치를 챘습니다. 지난 8월 마지막주 일요일이었습니다. 형님과 저는 벌초를 하러 고향 선산에 들렀지요. 요즘 아이들은 낫질도 할 줄 모르고 벌초에 따라나서지도 않습니다. 벌초를 업체에 위탁하는 시절이 되었으니까요. 선산에 오르려면 8촌 형님댁과 외가를 거쳐야 합니다. 8촌 형님은 몇 해 전 세상을 떠났고 심장병을 앓는 형수만 홀로 남았습니다. 외숙모도 세상을 떠났지요. 외숙은 혈압이 높은 데도 아들들의 모시겠다는 성화를 마다하고 혼자 외가를 지키고 있습니다.
벌초를 마치고 내려오다가 외가 집안의 고추밭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외6촌 형님과 형수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고향 사람이란 집안과 촌수를 떠나 이미 이웃이었고, 학교 선후배였으며, 같은 축구팀이었고, 참외 서리하던 장난꾸러기 무리였던 것입니다. 고향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가족처럼 반가울 수밖에 없는 까닭입니다. 외6촌 형님은 어쨌든 형님의 초등학교 4년쯤 선배였습니다.
외6촌 형님은 우리를 금방 알아보고 활짝 웃었지만 곁에 있던 형수는 우리를 얼른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오랜만에 고향 사람을 만나면 이런 일은 다반사지요.
“누구더라?” 형수가 물었고 “저, 찬서예요.” 형님이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형수는 “그래? 아이구 너도 많이 늙었구나”라고 했지요. 그러자 외6촌 형님이 혀를 끌끌 차면서 별소릴 다한다고 형수를 큰소리로 막 구박했습니다. 그 형님은 예전부터 말이 워낙 투박하긴 투박했었습니다.
저는 별일도 아닌 것을 갖고 뭘 그러시나 싶었을 뿐입니다. 늙었으니 늙었다고 말할 수도 있는 건데…. 그런데 제 형님은 고향을 뒤로하고 달리는 차 안에서 내내 표정이 어두웠습니다. 제가 까닭을 물었지요. 형님은 한숨부터 크게 내쉬고 마침내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형수가 내 초등학교 1년 후배거든.” 아, 후배가 반말을 해서 기분이 나빴다는 걸까. 잠시 우스운 생각이 들었지만 곧장 이어진 형님의 말에 웃을 수 없었습니다. “치매란다, 형수가.”
사람이 자연의 영향을 안 받고 살 수 없겠습니다만, 자연도 사람의 영향을 혹독하게 받는 게 사실인 것 같습니다. 지구 온난화 등 급격한 기후환경 변화는 사람의 영향인 게 분명한 것 같습니다. 또한 사람이 고향이라는 자연환경의 영향을 안 받고 자랄 수는 없었겠습니다만, 사람이 고향이라는 자연환경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맨드라미와 과꽃처럼 빛나던 고향이 늙고 외롭고 속절없이 병드는 이유가 있다면 그곳을 떠나고, 다시 찾지 않고, 찾더라도 무심하며, 마침내는 마음으로부터 잊고 마는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 아닐까.
포도씨유와 잣의 효능을 잘 알고 엄선하는 형님의 작은 노력은 앞으로 코코아뿐만 아니라 더 많고 다양한 선물을 선별하는 정성과 솜씨로 이어지면서 형님의 마음속에 가을꽃 같은 고향의 빛으로 되살아나 오래오래 남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