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희’
홍상수의 영화는 점점 능청스러워지고, 점점 유들유들해지며, 점점 재미있어진다. 점점 경쾌해지고, 점점 유머러스해진다. 편수를 더할수록 높아지는 것은 예술성만이 아니다. 유머지수, 그리고 알코올지수다. 홍 감독의 영화는 시답잖고 사소해 보이는 일상에서 인생의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마법’ 같은 순간을 포착한다. 일상이 부리는 그 마술은 객석에 진한 알코올 향내와 경쾌한 웃음 바이러스를 퍼뜨린다.
홍상수의 16번째 작품인 ‘우리 선희’<사진>는 한 여자와 세 남자의 이야기를 그렸다. 중심에는 여자가 있다. 그 여자를 만나고 바라보는 세 남자의 같거나 다른 말과 시선이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빙빙 돌며 이어진다. 여자의 이름은 ‘선희’(정유미 분)다. 졸업 후 잠적했다가 오랜만에 모교를 다시 찾는다. 영화과 졸업생인 선희는 해외 유학을 가기 위해 재학 중에 자신을 아꼈던 최 교수(김상중 분)에게 추천서를 부탁한다. 오랜만에 제자를 다시 만난 교수는 이런저런 충고를 늘어놓는다. 선희는 교수를 만나고 나오는 길에 우연히 옛 연인인 문수(이선균 분)를 만나 낮술을 한다. 선희는 술주정 같은 옛 연인의 애정 고백을 뒤로하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감상에 젖은 문수는 선배 감독인 재학(정재영 분)을 찾아 또 한잔을 청한다. 느닷없이 나타난 후배가 영 귀찮은 재학은 퉁명스러운 태도로 후배의 연애 고민을 들어준다. 한편, 다음날 선희는 다시 최 교수를 찾아가 추천서를 받지만 칭찬인지, 비난인지 모를 글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선희는 다시 써 달라며 최 교수와 술 한잔을 하게 되는데, 둘 사이에선 사제관계를 넘는 뭔가 끈끈한 분위기가 흐른다. 여제자의 부추김으로 다시 가슴이 설렌 최 교수는 마음 터놓고 지내는 후배를 찾는데, 그게 또 재학이다. 재학은 상대가 선희라는 사실을 모른 채 최 교수의 애정 고민을 들어준다. 그리고 재학은 오가던 동네 길에서 우연히 선희를 만나 다시 술집으로 향한다. 선희와 재학 사이에도 선후배관계를 넘는 묘한 기류가 흐른다. 이렇게 최 교수와 문수, 재학 사이에서 선희는 서로의 꿍꿍이와 비밀 애정사로 숨겨진 존재가 된다. 모두에게, 각자에게 선희는 그냥 선희가 아니라 ‘우리 선희’다. 선희는 없는 자리, 이 세 명이 함께 모이면 선희에 관한 어떤 말들이 오갈까?
홍 감독은 몇 가지 실제 겪었던 일화를 떠올리면서 이 영화를 만들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옛 제자가 추천사를 부탁했던 일, 그런데 써 준 추천사가 마음에 안 든다며 다시 써 달라고 청해왔던 일, 자신이 해준 충고를 아는 누군가가 똑같이 반복하고 있는 것을 듣고 당황했던 일, 누군가를 화제로 놓고 이러쿵저러쿵 말하다가 의견 일치를 보고 신기해했던 일 등이다. 그러면서 홍 감독은 “ (한 사람에 대한 평판에서) 의견 일치의 경우가 불일치한 의견으로 서로 충돌할 때보다 더 위험한 짓거리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홍상수의 영화는 시답잖고 사소해 보이는 술자리와 만남과 말들로 가득 채워졌고, 때로 대화는 어색하고 주춤하며 엇나가기 일쑤이며, 특별히 대단한 줄거리랄 것도 없는 일상적인 사건이 연속된다. 하지만 그 틈과 틈을 비집고 나오는 굉장한 유머와 아이러니, 그리고 인생의 진실과 성찰이 공명을 일으킨다. 그리고 무엇보다 홍상수의 영화는 스크린 속 술자리로 관객을 끌어당기는, 마법 같은 힘을 갖고 있다. 물론, 극장 문을 나서면서 다시 술집으로 발길을 향하게 한다. 이쯤 되면 ‘알코올지수’에서 홍상수의 영화는 독보적인 경지가 아닌가.
이형석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