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와인 산지 프랑스 보르도에서 ‘메독마라톤’ 지난달 개최…본지 안상미기자의 참가기
올해의 코스프레 주제는 SF 슈퍼맨과 초록빛 외계인 득실
1㎞ 달릴때마다 ‘환상의 마리아주’ 한모금씩만 마셔도 어느새 ‘알딸딸’ 완주는 뒷전…와인만 마시는 선수도
손꼽아 기다렸던 ‘샤토 라피트 로칠드’ 경쟁 치열해 다음 기약하며 발길 돌려
[보르도(프랑스)=안상미 기자] 지난달 7일 새벽 6시 반, 프랑스 보르도 시내 생장역(St. Jean). 파란색 쫄쫄이 스타일의 마라톤 복장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까 싶어 머뭇머뭇하면서 기차표를 사러 갔다. 그러나 걱정도 잠시. 대합실 같은 곳에 들어서니 이미 한 무리의 슈퍼맨들이 진을 치고 있는가 하면, 저 멀리서는 몸을 온통 초록빛으로 칠한 외계인들이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좀 더 과감하게 복장을 준비할 걸 그랬다며 한순간에 걱정이 아쉬움으로 바뀌었다.
지난 9월 세계적인 와인 산지인 프랑스 보르도에서 열린 메독마라톤(Marathon du Medoc)에 참가했다. 몇 년간 꿈꿔왔던 계획이 실현되는 날이었다.
▶슈퍼맨, 보르도 포도밭을 달리다=코스프레 복장을 하고 뛰어야 하는 메독마라톤의 올해 주제는 SF였다. 기차역이 슈퍼맨과 외계인으로 득실거렸던 이유다. 기자는 SF영화 ‘아바타’의 여자 주인공인 네이티리가 되기로 했다. 파란 피부에 꼬리가 달린 나비족 족장의 딸이다. 페이스페인팅은 영 자신이 없어서 가면을 하나 준비하고, 파란색 쫄쫄이 티셔츠로 분위기를 냈다. 동양인으로는 대부분 일본인들이 참가한다고 해서 한국인임을 알 수 있게 태극기 머리띠도 챙겨갔다.
출발한 지 십여 분이 지나자 말로만 듣던 보르도 포도밭이 나타났다. 보르도 젖줄인 지롱드 강 왼쪽으로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다. 환상적인 광경 못지않게 선수들 역시 이 축제를 제대로 즐기기 시작했다. 경찰관 복장을 한 선수는 호루라기를 불며 포도밭에 들어가 볼일을 보고 있는 슈퍼맨을 잡으러 뛰어다니고, 외계인들은 그들만의 언어로 합창을 하기 시작한다. 코스 도처에서 각본 없는 퍼포먼스가 펼쳐졌다.
마라톤 코스로서는 절대 쉽다고 할 수 없는 대회였다. 그도 그럴 것이 보르도에서 생산되는 주 포도품종이 메를로와 카베르네 쇼비뇽이라는 점을 알면 답은 쉽게 나온다. 메를로는 평지에서도 잘 자라지만 카베르네 쇼비뇽은 주로 경사진 언덕배기에서 자란다. 메를로 밭을 지나는가 싶으면 이내 카베르네 쇼비뇽 밭이 나타났다. 끊임없이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해야 하는 코스다. 그러나 힘든 오르막을 내달리고 나면 꼭 근사한 와인이 있는 샤토가 나타나니 이거 멈출 수가 없다. 보르도 그랑 크뤼 최고 등급으로 그 유명하다는 샤토 라투르, 샤토 라피트 로칠드는 물론 히딩크 와인으로 유명한 샤토 탈보와 샤토 뽕테 카네, 샤토 칼롱 세귀르, 샤토 린치 바쥬의 포도밭이 차례로 스쳐 지나갔다.
▶뛰면서 즐기는 환상의 ‘마리아주’=뛰는 데 무리가 될까 봐 한 모금씩만 마신다고 했는데도 양볼이 발그레해지는 게 알딸딸하다. 하긴 1km도 안 되는 사이마다 와인을 마시라고 부어주니 술이 깰 틈이 없다. 다른 선수들도 뛰는 것은 뒷전인 분위기다. 샤토에서 악단들이 흥겨운 연주를 시작하자 슈퍼맨과 외계인들이 뛰어들어 한바탕 춤판이 벌어졌다.
37km 지점을 지나니 이제 슬슬 지치기 시작했다. 무릎도 욱신거리고 발바닥도 아프다. 이제 정말 와인은 한 모금도 먹지 말고 물로 수분만 보충하자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또 뜻대로 되진 않았다. 가장 하이라이트라고도 할 수 있는 코스가 남아 있었던 것.
주최측은 골인지점을 5km 앞두고 전채요리인 굴과 이에 맞는 화이트와인부터 시작해서 1km마다 환상의 ‘마리아주(mariageㆍ음식과 와인의 궁합)’를 선보였다. 굴과 상큼한 화이트와인으로 입맛을 돋우고 나니 소갈빗살 스테이크 한 조각과 묵직한 레드와인이 있었고, 이어서는 치즈, 그리고 마지막 디저트로 아이스크림과 달콤한 화이트와인으로 마무리가 됐다. 뛰면서 숨가쁘게 즐기는 코스요리라니, 평생 잊지 못할 정찬이다.
결승점에 골인하고 나니 기록은 6시간 5분 50초. 완주를 인정받기 위한 컷오프타임이 6시간 30분이라 여유 있게 생각했는데 자칫하면 넘길 뻔했다. 그간 풀코스 평균 기록이 4시간 반 안팎이었는데 한 시간 반이나 늘어난 걸 보면 와인을 어지간히 마시긴 했나 보다. 이날 참가한 총 7905명 중 5282등을 했다. 완주는 포기하고 아예 눌러앉아서 와인을 마시기로 한 선수들도 꽤 있었던 모양이다.
▶참가비 78유로에 샤토 무통 로칠드를?=메독마라톤에 참가하는 선수들의 초미의 관심사는 뭐니 뭐니 해도 어떤 와인이 나올지다.
코스에 포함된 50여개 샤토 중 절반 이상이 가장 좋다는 그랑 크뤼급이고, 나머지도 그 바로 아래 등급인 크뤼 부르주아급이니 한국에서부터 기대가 컸다.
크뤼 부르주아 샤토들은 대표 와인을 아낌없이 쐈지만 못해도 몇십만원, 비싼 것은 백만원을 호가하는 그랑 크뤼 샤토들은 대부분 ‘세컨드 와인’을 내놨다. 세컨드 와인은 대표 와인과 같은 포도밭에서 생산하지만 포도나무의 수령이 어리거나 작황이 좋지 않을 때 만드는 와인이다. 그랑 크뤼 2등급인 샤토 피숑 롱그빌은 급수대에서 세컨드 와인인 ‘레 투렐 드 롱그빌’ 2011년산을 따라줬다. 현지에서도 한 병에 50유로(한화 약 7만7000원) 이상 하는 와인이니 세컨드 와인이라고 서운할 것은 없었다.
기다리고 기다렸던 그랑 크뤼 1등급 샤토 라피트 로칠드는 결국 입에 대보지도 못했다. 와인 등급을 제정할 때 1등급을 받은 단 5개의 샤토 중 하나인 곳으로, 유명세만큼 와인 한잔을 먹기 위한 선수들의 경쟁이 너무도 치열했다. 덩치 좋은 서구 선수들에 치여 다음을 기약하며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이날 세계 각지에서 모인 술꾼들이 해치운 와인의 양은 얼마나 될까. 한 샤토마다 내놓는 와인의 양이 오크통 1개 배럴, 와인병으로 치면 280병 정도라고 하니 오크통 50개 배럴, 1만4000병은 마시고 돌아간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