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이영란 선임기자] 여기 한 사람이 있다. 양팔을 늘어뜨린채 고개를 푹 숙이고, 상념에 빠진 검은 남자다. 그 남자 뒤로, 무표정한 얼굴로 먼 곳을 응시하는 두 사람이 서 있다. 모두 어둡고, 말이 없다.
이 침잠하는 듯한 청동 조각은 배형경(58)의 청동조각 ‘암시(Allusion)’(2013)이다. 서울대 조소과와 대학원을 나와 아홉번의 개인전을 가진 배형경은 지난 30여년간 일관되게 구상조각을 고집해왔다. 세련된 미니멀리즘 조각이며 미디어아트가 유행병처럼 번지고 있음에도, 그는 가장 클래식하고 가장 원초적인 인체조각을 통해 인간의 실존을 끈질기게 탐구해왔다.
그의 묵직한 표현주의적 인물 조각은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내면 깊은 곳의 외침을 치열하게 드러내고 있다. 무표정한 침묵 이면에는 강렬한 인간의 감성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작가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그리고 존재의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하려다 보니 자꾸 어두운 청동조각을 하게 된다”며 “허공을 바라보며 생각에 빠진 인물, 구석지고 어두운 곳에 서있는 인물, 세상을 거꾸로 바라보는 이물 등을 통해 일간의 실존을 드러내고자 했다”고 밝혔다.
작고 갸냘픈 체구로 자신의 키보다 크고, 묵직하며 작업과정도 더없이 까다로운 청동 인체상과 씨름하는 까닭이 궁금했다. 이에 대해 작가는 “요즘은 예쁘고 귀여운 캐릭터 작업이 유행하지만 나는 이런 추세를 거슬러 가자 마음 먹었다. 조각의 전통과 기본은 무엇일까 고민하다 ‘조각은 묵직한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남성들마저 포기하니 나라도 인체조각을 해야겠다는 뚝심도 생겼다“고 토로했다.
배형경의 어둡고 파워풀한 조각은 서울 통의동 갤러리시몬에서 ‘암시(Allusion)’라는 타이틀로 열리는 작품전에서 만날 수 있다. 이번이 열번째 개인전으로, 작가는 실물대보다 큰 검고 어두운 인물조각을 통해 ‘지금 우리는 어디에 와있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되묻게 한다. 거꾸로 매달린 조각, 벽에 머리를 박고 있는 조각, 그리고 계단참에 쭈그리고 앉은 조각들에서 바로 번뇌에 빠진 우리 스스로의 모습을 읽게 된다.
이번 전시에는 작가가 작품의 구상단계에서 에스키스하듯 손으로 흙을 주물러 만든 부조작업 ‘꿈’ 시리즈도 처음으로 공개됐다. 작은 사각의 릴리프 작품에도 고독을 넘어 실존을 향해 달려가는 인간의 번뇌가 오롯이 담겨 있어 보는 이의 시선을 붙든다. 전시는 12월 6일까지. 02-549-3031.
